요즈음 우리 사회는 ‘내 편이냐, 네 편이냐’ 가르는 일로 점점 열기를 더하고 있는 형국이다. 선거라는 것은 아무리 듣기 좋은 말로 장식한다 할지라도 결국은 ‘편 가르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초등학교 꼬맹이들의 반장 선거에서부터, 나라님을 내세우는 대선까지 결국은 네 편을 배척하고, 내 편을 선호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원론은 언제나 정당하다. 각종 인연에 연연해하거나, 조작된 이미지에 놀아나거나, 배타적 감정에 사로잡혀 건전한 이성적 요구를 모르쇠 한 ‘묻지 마 투표’는 옳지 않다는. 또한 원리는 항상 옳다. 당장 눈앞의 유불리나 손익 계산에 사로잡히지 말고, 조직과 사회와 나라의 장래를 감당할 정책과 인물을 보고 투표하라는. 그럼에도 원론은 언제나 담론에 머물고, 원리는 항상 교과서에서 잠을 잔다.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선거가 피할 수 없는 편 가르기 행위라면, 그 편 가르기나마 제대로 하자는 것이다. 제대로 하는 편 가르기의 제일 원칙은 말할 것도 없이 누가 내 편이고, 누가 네 편이냐를 분별하는 행위로부터 비롯한다 할 것이다. 내 편 네 편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함으로써 머슴을 뽑는 주권 행사가 상전을 뽑는 반역이 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하는 말이다. 그 결과 기껏 뽑은 머슴이 주인 행세를 하고, 그 주인은 마침내 머슴으로 전락하는 꼴을 당하기 십상이기에 하는 말이다.
 
“이 기분, 처음이 아니다. 2008년 6월, 야구장이 아니라 시청 앞 광장에 서 있었던 그때도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다. 17인치 모니터 속 글줄들로 넘겨짚어선 안 되는 열정들이, 그곳에서는 나와 ‘같은 편’이었다. 그리하여 다시금 깨닫는다. 나는 이 팀을 떠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아무리 9시 뉴스를 볼 때마다 ‘이놈의 나라’라는 관용구를 입에 달고 사는 나지만, 의외로 가까운 곳에 ‘같은 편’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놈의 나라를 결코 뜰 수 없다는 사실을. 피곤한 땅에서의 삶은 그렇게 위안과 에너지를 얻는다.<한겨레.‘10.05.06에서>

내 편은 편안하다. 싸움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싸움을 말리기 때문에, 네 편을 미워하기보다는 내 편을 사랑하기 때문에, 불칼을 들고 설쳐대기보다는 촛불을 들고 눈물 흘리기 때문에, 부유함을 시기하기보다는 가난을 동정하기 때문에, 상처를 건드리기보다는 아픔을 감싸 안기 때문에, 나를 내세우기보다는 우리를 앞세우기 때문에 내 편은 편안하다.

내 편은 위로를 준다. 더디 가도 멀리 가는 발길에, 크고 작음으로 강하고 연약함으로 차별하지 않는 생명의식에, 어리석은 자기를 꾸짖듯이 어리석은 타인에게 베푸는 관용에, 독재를 거부하는 몸짓으로 독재에 신음하는 동족을 감싸 안는 동포애에,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려운 세계인을 포옹하는 시민의식에 우리 편은 항상 위로를 받는다.   

내 편은 힘을 준다. 넘어질 때마다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실수할 때마다 박수 쳐주는 격려를, 더러운 승리자보다 깨끗한 패배자를, 편안한 불법보다는 불편한 준법을, 많은 이들이 걷는 넓은 길의 거짓보다는 소수의 사람들이 걷는 좁은 길의 진실을, 자연을 지키고 향토를 지키고 역사를 지키는 이들을 내 편은 외면하지 않고 힘을 실어 준다.   

그래서 제대로 된 내 편을 뽑아야 한다. 우리에게, 생활 공동체에게, 생태 생명계에게, 세계시민에게 정당한 힘을 불어넣어주는 세력, 따뜻하게 위로하는 손길, 모두를 편안케 하는 사람과 세력이 바로 ‘내 편’이다. 이들, 바로 내 편이 평화전투의 선봉에 서야 한다. 그래야 결코 떠날 수 없는 ‘이놈의 나라’에서 살아갈 수 있는 위안과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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