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옥 국가기록원장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 ”
 
우리 민족의 애환과 정서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아리랑의 한 대목이다. 하지만 최근 중국발 ‘아리랑 국가무형문화유산 지정’ 소식은 태풍 ‘메아리’를 압도했다. 국민들이 받은 충격 역시 만만치 않다. 일제의 폭압과 625전쟁의 포탄 속에서도 아리랑은 항상 우리와 함께 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아리랑이 갖는 의미를 강조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아리랑은 ‘우리의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헐버트 아리랑 악보에 남겨

아리랑은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어 온 까닭에 아리랑 기록이 온전히 남아 있지는 않지만, 황현의 『매천야록』에 고종의 아리랑 사랑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 의하면 고종이 아리랑을 즐겨 전담 관리를 두었고, ‘경연’을 통해 상을 내리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의 가락 아리랑은 일제시기 치안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발매금지를 당하는 등 수난을 겪기도 했다. 이러한 아리랑을 오선지 악보에 옮겨 기록으로 남긴 이가 있다. 바로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 ~ 1949)가 그 주인공이다.
 
헐버트는 1886년 우리나라 최초 외국인 학교인 육영공원 영어교사로 재직하며 우리나라와 인연을 맺었다. 이후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고종의 친서를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결국 그는 고종친서를 루즈벨트에게 전달하지는 못했지만, 1906년 헤이그밀사 사건 당시에도 일본침략에 대한 부당을 역설하는 등 우리나라 구국운동에 앞장섰다.
 
헐버트가 우리나라와 맺은 인연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것은 아리랑이었다. 헐버트는 고종이 즐겨 듣던 아리랑을 ‘한국소식(Korea Repository, 1896)’이라는 잡지에 기록으로 남겼다. 아리랑이 오선지 위에 기록으로 남겨지는 순간이었다. 1926년 나운규(1902~1937)가 제작한「아리랑」도 헐버트의 기록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운규의 「아리랑」영화필름은 그 행방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다. 헐버트는 아리랑을 “포구의 어린애들도 부르는 조선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녹아 있는 노래”이며 “조선인들에게 쌀과 같은 존재”라고 평가했다. 헐버트는 1949년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하던 중 숨을 거두었다. 그의 마지막 유언은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 땅에 묻히고 싶다”고 했다. 그의 유언에 따라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고이 잠들었다.
 
아리랑은 625전쟁을 겪으면서 본격적으로 연합군에 의해 세계로 울려 퍼졌다. 특히 미군들은 어린아이까지 부르는 아리랑의 장중함과 깊이에 빠져 들었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아리랑을 콧노래로 흥얼거릴 정도였단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주도했던 7사단은 사단가 ‘대검가’를 아리랑에 맞춰 불렀다고 전한다.
 
     아리랑 체계적 수집관리 필요

아리랑은 우리의 아픈 역사의 마디마디를 함께 했기에 이번 일이 더욱 슬프고 아프다. 하지만 우리는 보다 이성적으로 대처할 필요가 있다. 우선 아리랑 관련 기록을 국가는 물론 민간차원에서도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관리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기록이 없으면 역사가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오늘 아리랑 한 대목이 가슴에 사무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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