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뜨고 코 베어가는 세상이지만, 눈을 뜨고도 사물을 분간하지 못하면 낭패를 당하기 마련이다. 눈이 사물을 분간하고 됨됨이를 인식하는 일차적인 정보원일지라도, 그 눈마저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

장례식장에 가서 문상을 마치고 벗어둔 신발을 찾는데, 현관 가득 흩어진 신발들 중에서 내 것을 찾는 것처럼 난감한 일이 또 있을까? 우선은 색깔이 같은 신발에 주목해 보지만, 대부분 검은 색 일변도여서 색깔로 찾기는 그리 좋은 방법이 아니다. 다음에 구두의 디자인을 떠올려 보지만 구두 디자인이라는 것이 오십 보 백 보다. 그래도 끈이 달려 있는지, 아니면 끈 없는 구두인지를 분간하여 찾으려 한다. 설사 색깔과 디자인에 확신이 서서 발을 꿰어보지만 이것만도 자신할 일은 아니다. 몇 켤레의 구두를 교대로 신는 형편이고 보니 아침에 신고 나온 신발이 무엇이었던가 주저하게 된다. 이런 망설임을 극복하고 드디어 가능성이 가장 큰 신발에 발을 디밀어 보고서야 비로소 내 신발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기억이나 눈의 확인이 아니라, 사고 작용도 할 줄 모르고, 시력도 없는 순전히 발의 감각이 이루어내는 성과인 것이다. 눈 없는 발이 나를 찾게 해주는 열쇠가 되는 것이다.

여러 개의 가방이 동시에 쏟아져 나오는 공항의 출입국 창구에서 내 가방을 찾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색깔이며 디자인이 꼭 같은 가방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올 때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여기에 제조회사가 같으면 영락없이 가방이 바뀌기 십상이다. 이때도 인식의 창구요 절대 강자인 눈-시력에만 의지하면 실패하기 쉽다. 눈보다는 내 손에 익숙한 정도, 내 어깨가 감당했던 무게를 가늠하여 가방을 찾는 것이 오히려 눈보다 정확할 수 있다. 가방의 손잡이를 잡아보면 내 손에 지문처럼 남아 있을 감촉과 무게감이 눈보다 정확할 때도 있다. 눈 없는 손이 나를 찾게 해주는 열쇠가 되는 것이다.

이번 장마철에 필자는 두어 개의 우산을 잃어버렸다. 비 올 때 들고나간 우산이 돌아올 때 비가 그치면 그 우산은 이미 내 것이 아니다. 어떤 이는 이제 우산은 내 것 남의 것 가리지 말고 그저 있는 곳에서 서로 돌려가며 써야 할 공공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비 내리는 귀갓길에 우산이 없어 당하는 낭패를 모르고 하시는 말씀이다. 색깔이나 디자인을 떠올려서 내 것을 확인하려 하지만, 우산꽂이에 있는 여러 우산 중에서 어쩌다 한 번 사용하는 내 우산을 고른다는 것은, 운명을 건 심지 뽑기만큼 지난한 일이다.

 <눈물이 무겁게 가라앉아 어두운 곳에는/ 어쩌면 그렇게도/ 닮은 행선지들이 많은지,/ 그 중에서 나를 찾는다는 것은 눈을 뜨고도 난감한/ 일이다, 지난한 거사다./ 뒤축이 처진 어깨모양으로 닳아빠진 젊은 방황을 보자/ 너일까?/ 이백육십오 밀리의 직립보행을 밀어 넣어 보지만/ 아니다, 아닌 것이다/ 돌아갈 수 없는 지나온 정거장인 것이다/ 질끈 동여맨/ 머리끈 같은 뜨거운 목소리가 닮아서/ 검은 끈으로 묶인 결의에 족근골 일곱 마디를 정조준해보지만/ 과녁은 매양/ 낯선 이방인으로 따돌림 당하는 것이다./ 문전박대 외톨이가 된 세상인/ 것이다, 익숙지 않은 낙오자인 것이다./ 비로소 눈이 아닌,/ 어둠에도 낯익은 육십구 킬로그램의 중력이 닿자/ 화들짝 시동이 걸리며 질주하는/ 본능이라는 빠르기의 안전속도라니>-이동희「신발 찾기」전문
 
어찌 신발 찾기뿐이랴. 이 험한 세상에서 한번 잊으면 다시는 되찾기 어려운 자아상실감도 마찬가지다. 그저 세상 되어가는 대로 흘러가지 않고, 세상의 흐름을 내 삶의 속도로 맞추기 위해서는 나를 찾는 일에 나서야 한다. 그것은 시력에만 의지할 일이 아니라, 신발을 찾는 데는 발의 감각이, 가방이나 우산을 찾는 데는 손의 감각이 필요한 것처럼, 내 안에서 나를 울려주는 감성의 맥락이 바로 나를 찾는 열쇠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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