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살 언니에게 동생이 생겼다. 불러오는 제 어미의 배를 만져보며 호기심 반 의아심 반으로 몇 달을 보낸 뒤 드디어 동생이 생겼다. 엄마의 산후조리 기간에 할머니 할아버지와 지내는 동안 유난이 심통이 거셌다. 갓 태어난 동생이 보고 싶다가도 불현듯 밉기도 했다. 동생 때문에 엄마 아빠와 떨어져 살아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다가도 할머니 할아버지 사랑을 독차지하는 며칠이 그리 싫지 않는 듯했다. 그것도 잠시였다. 한 달을 참지 못했다. 그예 날마다 조르고 생떼를 썼다. 엄마 아빠가 보고 싶다고 억지를 부렸다. 하긴 언니에게 그것은 생떼가 아니라 순리였으리라. 동생이 생기는 일과 언니가 엄마 아빠와 떨어져 지내는 일이 이해할 수 없었다. 어른들의 순리가 다섯 살 언니에겐 이상하기만 하였다.

동생이 돌이 되도록 언니의 외로움은 배가 되었다. 모든 것이 동생 위주였다. 언니가 누리던 행복한 사랑의 보살핌도 모두가 동생 차지였다. 심통이 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꼬물거리며 앙증맞은 동생이 한 편 돌아보면 귀엽기 짝이 없다. 그러나 언니보다 더 보살펴지고 더 사랑 받는 동생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언니는 동생을 미워하는 방법으로 사랑하기 시작했다. 말 못하는 동생의 응석을 언니의 언어로 해석하여 하소연 했다. 동생이 언니를 미워한다고 엄마 아빠에게 일러 바쳤다. 미분화된 동생의 손길이 살짝 스치기만 해도 동생이 언니를 때렸다며 울상을 지었다. 순전히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려고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과장하며 징징거렸다.

 < 갓 난 동생이 와서/ 다섯 살 언니에게 미운 뿔이 자란다.// 날마다 빨간 손톱도 자라고, 눈엣가시도/ 돋는다, 그래도/ 꽃은 벌 때문에 지지 않는다.// 양지와 그늘 사이에 국경선은 없는 것/ 너와 나 사이가 그렇듯이// 和는 언제나 아군이 아니다. 同도/ 착한 군대는 어디에서도/ 전투할수록 승리를 잃는 전장을/ 싸울 뿐이다. 나쁜 군대도// 피를 흘리지 않는 용병 없는 나라에서/ 성전은 언제나/ 패배하는 전투가 아니던가?/ 그대, 마르지 않는 증언의 불립문자여!// 그러므로 폭풍우를 보내어 사랑하는 방법으로/ 내 안의 선악을 흔드는 계절이여/ 규정할 수 없는 정체여!>-이동희의 「미운 사랑」전문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 하고, 소인은 동이불화(同而不和)라 했다. 화는 선하고 옳은 것이며, 동은 악하고 나쁜 것이다. 인격적으로 성숙한 인간은 화합하되 부화뇌동하지 않으며, 인격적으로 덜 성숙한 인간은 뇌동하되 화합할 줄 모른다고 했다. 과연 그럴까?

화는 화합, 화목, 조화, 평화, 화평 등등 좋은 의미를 파생시킨다. 동도 마찬가지다. 동조, 동화, 동심, 대동, 협동 등등 좋은 의미의 파생어들이 즐비하다. 문제는 화와 동에 있지 않다. 사리사욕 앞에서 배타적 이익을 챙기기 위하여 규합하는 세력에 ‘자신의 뜻’을 굽히고 부화하는 뇌동(雷同)이 나쁠 따름이다. 화도 마찬가지다. 화는 합(合)의 옛말이다. 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숱한 경로와 현상들로부터 ‘자신의 뜻’을 굽히고 합해야만 화에 이를 수 있다. 그러므로 이익을 좇아 ‘자신의 뜻’을 세우느냐 굽히느냐에 옳고 그름이 있을 뿐이다.

선악(善惡)도 마찬가지다. 고정된 관념의 선과 악이 어디에 존재할 수 있겠는가? 억강부약(抑强扶弱)-강자를 누르고 약자를 도와주는 것이 선이라 여길 것이다. 그러나 약육강식(弱肉强食)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생태계의 입장에서 보면 먹이사슬의 최 정점에 있는 인간이 가장 나쁜 존재일 수밖에 없다. 과연 그런가? 성전(聖戰)은 무슨 미명으로 치장해도 결국은 전쟁이듯이, 동생을 시샘하는 언니의 투정도 ‘미운 사랑’으로 귀엽기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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