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집(畵集)에서 벨기에의 화가 야콥 요르단스가 그린 <사티로스와 농부>라는 그림을 본다. 1620년경에 그려진 4점의 그림은 서기 400년 경 라틴의 풍자시인 아비아누스의 우화집에 실린 ‘사티로스와 농부’의 이야기를 형상화하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사티로스’는 염소 다리에 사람의 윗몸을 가진 반신반수의 괴물이다. 추운 겨울, 농부가 언 손을 녹이려고 손바닥에 입김을 불어넣었다. 그 이유를 궁금해 하는 사티로스에게 농부는 “손이 얼어서 녹이려고”라고 말한다. 사티로스는 농부가 마음에 들었고, 둘은 친구가 되었다. 농부의 집에 초대된 사티로스에게 농부의 아내는 뜨거운 죽을 끓여왔다. 농부는 뜨거운 죽을 나무숟가락으로 떠서는 살살 입김을 불었다. 사티로스는 그 이유가 또 궁금했다. 이에 농부는 “죽이 뜨거워서 식히려고”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사티로스는 같은 입으로 아까는 더운 바람을 불었는데 이제는 찬바람을 분단 말인가? 어리둥절하다 못해 크게 실망하고 분노한 사티로스는 당장 절교를 선언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이 이야기는 에라스뮈스의 ‘우신예찬’에도 실려 있고, ‘이솝 우화집’에도 전하고 있지만, 이 고대 우화가 전하고자 하는 교훈은 다르지 않다. ‘한 입으로 두 말을 하는 사람은 친구로서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화가가 그림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듣노라면 입으로만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무용가와 연기자는 몸으로 말하고, 음악가는 소리로 말하지만, 악기를 연주하는 음악가와 그 음악을 연출해 내는 지휘자는 온몸으로 음악을 말한다. 건축가는 물질로 말한다. 모든 사람은 입이 아닌 작용과 표현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되 ‘두 말’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예술이다.

어디 사람이 하는 일뿐이랴? 듣고자만 한다면 세상은 온통 말의 천지다. 아침 해가 희망을 발언한다면, 저녁 해는 절망을 발설한다 할 것이다. 아침 새는 배고픔을 하소연한다면, 저녁 새는 그리움을 노래한다고 들을 수 있다. 강물은 묵묵히 시간을 이야기하며 흘러간다면, 산맥 또한 묵묵히 공간을 이야기하며 이어지는 것이리라. 상록수는 지는 잎을 숨기고 남은 잎으로 자신을 세우는 푸른 발언을 하고, 낙엽수는 철 따라 갈아 있는 입성으로 계절을 알려주는 발설을 하리라. 저들이 하는 말은 천추에 변함이 없다. 그래서 자연이다.

말하는 입은 하나지만 듣는 귀는 둘이다. 그 입으로 여름에는 겨울을 그리워하고, 겨울에는 여름을 그리워한다면 듣기 좋아 다행이다. 같은 입으로 겨울에 혹독한 추위를 저주하고, 여름에 가혹한 무더위를 질타한다면 자연이 있을 곳은 없다. 자연(自然)은 사연(事然)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관계하는 타인-친구는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 그 사람을 호불호에 따라, 빈부귀천에 따라, 형편의 좋고 나쁨에 따라 한 입으로 다른 말을 한다면 사람 역시 있을 곳이 없다. 한 입으로 두 말하지 않는 자연처럼 사람도 그래야 한다.

 <돌아서라/ 쫓겨 가지 말고,/ 그냥/ 마주서 돌팔매의 과녁이 되어라/ 지난겨울에 내린/ 참혹한 낭설에 그리 휘둘리지 마라/ 너 아닌 풍문도/ 숨을 죽이리니/ 바람의 속살로 어루만지는 생각의 끝 가지/ 나 아닌 적설마저/ 자리를 내 주리니/ 햇살 작살이 당도하는 얼음 옷에도/ 텃새들 미풍의 날갯짓으로/ 마침내/ 무너지고야 마는/ 견고한 성채일수록 굳은 관절이 아니더냐?>-이동희「風雪」전문
 
모악산에 갔다. 청명한 날씨에도 숲에는 눈이 내렸다. 영하권을 맴도는 강추위로 내린 눈이 나뭇가지에 쌓였다가 지나가는 바람자락에 산화하는 모습이다. 풍설은 風雪도 되고 風說도 된다. 눈이건 말이건 지나가는 바람에 흩어지는 것이라면 굳이 애달파할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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