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여기가 황손이 사신다는 승광재가 맞나요. 그런데 왜 문에 현판이 없죠?” 8일 오후 한옥마을 승광재 앞에서 한옥마을 지도를 손에 쥔 관광객은 골목 입구 작은 표지판을 보고 겨우 승광재를 찾았는데 문 위에 걸려있어야 할 현판 ‘승광재’가 없다며 고개를 갸우뚱 거린다.

또 다른 관광객들도 승광재에 사는 황손을 보고 싶어 왔는데 막상 안에 들어서니 안내 사진 한 장도 걸려있지 않는 집에 황손도 보이지 않고 썰렁하기만 하다며 발길을 돌렸다.

다 이유가 있었다.

황손 이석(71)이 지난 설을 앞두고 홀연히 승광재를 떠났다.

인근 주민들 증언에 의하면 황손 본인 스스로 승광재 현판을 떼어내면서 “내 허락없이 다시 현판을 달지 말라”고 했다는 것. 현재 황손은 지인을 따라 다른 지역에 머물고 있다.

황손은 기자와의 통화를 통해 “조만간 전주에 들려 송하진 전주시장과 김완주 전북도지사를 만나 가슴 속에 있는 얘기를 할 예정이다”며 말을 아꼈다.

평소 황손과 교류가 있었던 주민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황손이 승광재를 떠난 이유는 전주시에 대한 서운함이 가장 큰 요인이었던 것으로 요약된다.

황손은 지난 2004년 전주시가 자리를 마련해 줘 승광재에 정착했지만 최근 1~2년 사이 ‘전주시가 자신한테 소홀하다’며 많이 힘들어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전주 정착 이후 일부 공무원과 시의원들이 승광재에 대해 ‘시설 운영의 효율성이 낮다’ 거나 ‘황손이 승광재를 너무 많이 비운다’는 등 지속적인 비판을 제기한 것에 대해 ‘억울하다’는 입장을 보였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 올 승광재 설날 행사와 관련 예산문제를 놓고 전주시 관계자와 의견 충돌이 생기자 “공무원들까지 힘들게 하고 싶지 않다”며 승광재를 떠났다는 것이다.

특히 남은 인생을 전주와 전통문화를 지키고 선양시키는데 기여하고 싶다는 자신의 의지가 왜곡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일련의 과정 속에 노출되면서 상처를 많이 입었다는 것이 황손을 지켜본 주민들의 전언. 주민들은 이처럼 승광재의 파행이 계속되면 한옥마을관광에도 차질이 빚어질 것으로 우려하고 한편 전주시의 무성의를 비판하고 있다.

승광재 인근에서 민박을 운영하는 주민은 “승광재의 존재 가치는 매일 외지 관광객을 손님으로 맞는 우리들이 가장 잘 아는 위치에 있다”고 전제하면서 “전주 한옥마을이 여느 한옥마을과 다른 장점은 조선왕조의 본향이라는 ‘상징’에 있다”며 경기전과 함께 그 상징의 하나인 승광재가 사라진다면 한옥마을은 한 팔을 잃는 일이나 마찬가지라고 강조했다.

또 다른 주민은 “전임 김완주 시장 시절이지만 황손이라며 대우를 해 모셔놓고 이제는 ‘나몰라라’한다는 것은 전통의 고장, 전주에서는 결코 있어서는 안될 일로 황손을 황손답게 대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전주시 관계자는 “그동안 황손에 대해서는 많은 관심을 갖고 잘 모셨는데 이런 일이 생겨 안타깝다”며 “오는 20일 황손이 전주에 오시면 대화를 통해 이번 사태를 원만히 해결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이병재기자

▲승광재(承光齋)는 2004년 10월에 개관한 황손 이석의 거처다.

‘빛을 계승한다’는 뜻으로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연호인 ‘광무(光武)’를 잇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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