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1인당 4~5번 참가, 사망 53명 등 195명 부상

군산지역 3·1운동은 당시 궁멀(현 구암동)에 있던 영명학교(현 제일중·고) 졸업생으로 세브란스 의학전문 학생이었던 김병수씨가 독립운동가 33인중 한 사람인 이갑성씨로부터 받은 독립선언서 200장을 가지고 와 영명학교 교사들에게 전한 것이 발단이 됐다.

이에 영명학교 교사 이두열·박세연·송현호·고석주·김수영씨 등은 독립선언서 3,500장을 더 인쇄해 기독교 신자 및 애국 의식이 강한 일반인들에게 나눠주며 태극기를 만들어 만세 준비를 했다.

그러던 중 1919년 3월 4일 새벽, 거사 계획을 눈치 챈 군산경찰서의 무장 경찰관 수십 명이 쳐들어와 주모자인 박세연과 이두열 교사를 잡아가는 바람에 6일로 계획한 설애장터 만세 시위는 무산될 형편에 이르렀다.

사태가 급박하게 되자 김수영·고석주 교사와 학생들은 거사를 하루 앞당겨 3월 5일 교사들의 석방을 주장하며 군산경찰서 앞에서 만세를 불렀는데 이것이 전북최초의 만세 운동이 됐다.

영명학교와 멜볼딘여학교(현 영광여중∙고)가 주동이 돼 100여 명으로 시작한 시위는 보통학교 학생들과 일반 시민이 합세해 500여 명으로 늘어나 기세를 올렸다.

이에 당황한 일본 경찰은 재향 군인들과 의용소방대원들을 진압에 동원하고도 부족해지자 이리 주재 헌병대 도움까지 요청해 90여명을 잡아 들였다.

이러한 만세 시위는 열기를 더해 3월 말에 군산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입학 거부를 했고 이어 학교에 불을 질러 일본 경찰을 놀라게 했다.

또한 3월 28일에는 일본인이 많이 사는 대화정(현 영화동)에 불을 지르기도 했으며, 3월 30일에는 다음날 열릴 만세 주동자 공판을 앞두고 시민들 수천 명이 밤에 횃불과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해 일본 경찰과 큰 충돌을 빚었다.

이때 당시 군산에서는 3월 5일에서 5월까지 시민들의 만세 시위가 계속됐으며, 이 기간동안 총 28회에 걸쳐 연인원 3만여명이 만세에 참가했고 사망 53명, 실종 72명과 함께 195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러한 시위는 당시 군산에 살고 있던 한국인이 6,581명으로 기록돼 있어 시민 1인당 4~5번은 참가한 것으로, 군산시민이 하나가 된 만세운동이었다.

한편 군산3·1운동기념사업회는 해마다 3월 1일에 구암교회에서 군산경찰서를 돌아 3·1운동 기념관까지 평화대행진을 통해 군산3·5 독립만세 운동을 재현하고 있다.

/군산=김기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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