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뜸 고전의 한 구절을 인용하려니 생각의 알갱이가 여물지 못한듯하여 켕긴다.

그러나 성인의 혜안을 빌리는 것은 졸장부의 몰염치 이전에 배움이 향해야 할 길이 아니던가. 『논어』술이편 제26장에 ‘釣而不網 弋不射宿(조이불망 익불사숙)’이라 했다.

‘낚시질은 하되 그물질은 안 하며, 주살질은 하되 둥지의 (잠자는)새는 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뜻을 묻는 이에게 탄허(呑虛.‘13~’83)스님은 이렇게 풀이하였다.

‘낚시질은 고기가 물어서 잡히지만 그물질은 도망가는 고기마저 잡으니까 차마 어떻게 그물질을 하겠는가. 화살로 새를 쏘아 잡지만 꾸벅꾸벅 졸고 있거나 둥지에서 새끼를 돌보는 새를 차마 못 쏘는 것이다.

눈 뜨고 날아가는 놈은 화살을 보고서 달아날 수 있지만 조는 새는 못 보고 있는데 어찌 쏘겠느냐?’고 반문한다.

성인의 말씀이나, 성인의 말씀을 받아 풀이하신 선지식(善知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만물의 영장을 자처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어진[仁] 마음으로 바른 길[道]를 찾는 이의 의견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그렇다.

낚시질은 먹이에 눈이 멀어 함정을 피해가지 않는 고기만 낚는 일이니 그리 무자비하지 않으며, 그물질은 드넓은 물길에서 한정된 공간에서만 일망타진(一網打盡)하는 효율적 생업활동이니 역시 바른길이 아니라 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둥지에 들어 잠자는 새를 쏘지 못하는 마음으로 어떻게 치열하게 생의 전선으로 날아가는 눈뜬 새는 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을 차마 어진 마음[仁)이요 바른 행위[道]라고 할 수 있겠는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성인과 선지식의 차원을 떠나서 필자의 일상으로 눈길을 돌려 보았다.

손바닥만 한 화단 한 구석에 케일모종 여남은 포기를 심었다.

아침나절에 물길을 주고 저물녘에는 손길을 주며 돌보았다.

싱싱하게 자라는 케일 이파리를 두어 차례 수확해서 쌈을 싸먹었다.

그뿐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케일이 자라기가 무섭게 벌레들이 달려들어 쏘아대는 통에 앙상한 잎맥만 남은 처참한 모습이 되었다.

그 이파리를 자세히 살펴보니 온몸에 파란 벌레들이 다글다글 달라붙어 손을 쓸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자~! 이를 어찌할 것인가? 저들의 먹이활동을 방치하는 마음[仁]을 지닐 것인가? 아니면 푸른 영성이 뭉쳐 있는 것처럼 부드러운 저 움직임을 단칼에 베어버리고 사람의 유익을 구[道]할 것인가? 하지 않아도 좋을지 모를 고민에 들게 하였다.

  <케일 몇 포기를 손바닥에 심었다/ 날마다 손금을 보는데/ 재미가 쏠쏠하다// 하늘 파란 기운이 뻗치는 날에는 양산이 되어/ 허기마저 그늘에 들게 하더니/ 궂은 심기 눈물 비치면/ 동글동글 은구슬 놀이하며 놀자한다./ 그래 그냥 놀자 한다// 손바닥 놀이터는/ 지금 한창 구조조정 중이다// 머리도몸통도다리도더듬이도캐터필러발도/ 파랑으로 무장한 장난감병정/ 새로이 손금을 긋거나 함정을 파며 논다// 파랑병정이 파랑공사를 하는 동안/ 붉은 물감을 음모하는/ 손바닥의 머리// 나는 밤새 한 마리 푸른 벌레/ 온몸에 붉은 화염을 쓰고 지옥으로 굴러 떨어지는,/ 손금에 새겨진 꿈길에서 놀았다.>-이동희「푸른 벌레」전문  

어진 마음으로 바른 길을 가지 않을 수도 있고, 바른 길을 가면서도 어질지 못할 수도 있다.

어진 마음으로 바른 길만 갈 수 있기를 바라는 삶에서 현실과 이상은 늘 엇박자를 놓는다.

그래도 정신과 사상의 무한 자유공간이나, 생명체가 가야할 자연스러운 삶을 훼방하는 악의적인 덧칠은 한사코 피해야 한다.

붉은 덧칠은 반생명의 패악(悖惡)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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