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이십년도 더 지난 어느 날 지인과 함께 점심인가 저녁 식사를 위해 구 전북도청 근방에 있는 한식음식점에 들렸다. 무심코 옆자리를 보니 건너편에 앉은 이의 얼굴이 눈에 익었다. 서민풍의 얼굴 모습과 장난 끼 섞인 표정에서 얼른 상대방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렇대서 일면식도 없는 처지에 섣불리 말을 붙이기도 서먹해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저~, 공옥진 여사님이시지요?” “아니, 어찌 나같이 천한 춤꾼을 알아봐주신당가요?” “아~ 맞군요!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등의 수인사를 건넸으며, 공여사가 심혈을 기울여 펼쳐내고 있는 1인창무극 ‘병신춤’의 선구적 예인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음을 인사말씀 삼아 드렸건 것 같다. 당신께서는 그저 겸사와 겸손한 자세로 일관하며 오히려 천한 소리꾼이요 춤꾼에 불과한 자신을 그처럼 알아봐주니 고맙다며, 몸에 익은 낮춤의 자세로 일관했다.

공옥진 여사 일행은 이내 식사를 마치고 자리를 떴다. 우리도 식사를 끝내고 계산을 하려 하니 이미 공옥진 여사께서 우리 몫까지 내셨다는 것이 아닌가? 어안이 벙벙했다. 우리 고장을 찾아오신 귀한 예인을 대접은 못할망정 오히려 그분의 대접을 받다니? 뭔가 칠칠치 못하고 변통머리 없는 나의 처신에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당시 필자는『뿌리깊은나무』라는 잡지를 열독했다. 투철한 편집정신과 겨레에 대한 애정을 바탕엔 둔 문화의식, 의미 깊은 내용과 아름다운 편집체제로 우리나라 잡지사에 한 획을 그었다는 평판이 무색하지 않은 잡지였다. 이런 잡지가 군사문화에 찌들고 독재의 망령이 그늘을 드리운 당시 온존할 리가 없었다. 결국 폐간으로 단명한 것은 못내 아쉽기만 하다.

이 잡지의 혁신적 특징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그중 한글전용과 가로쓰기 편집은 당시 우리나라 출판인쇄문화를 선도하는 획기적인 일이었으며, 형식만이 아니라 내용에서도 오염되지 않은 우리말을 찾아 쓰려는 노력과 함께 제도권이나 외래의 영향을 받지 않은 민중예술과 그 예인들을 발굴하여 알리며 보존전승하려는 노력은 가히 눈물겨운 바가 있었다. 일례로『뿌리깊은나무』에서는 ‘이 땅에 묻혀 이 땅의 얼과 넋을 일구는 풀뿌리 장인과 예인’을 진정한 의미의 위인이나 예술가로 보았다. 이들을 대상으로 민중전기집을 출간한 것은 이 잡지의 정신을 집약한 쾌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공옥진 여사의 예술 업적을 귀동냥이라도 하게 된 것도 순전히 이 잡지의 그런 노력의 결과였다.

 <인연이란 그런 거라네/ <뿌리깊은나무>에서 심은 뿌리 깊은 장인들을/ 뿌리부터 이파리까지 만나 본 다음부터/ 모자람이 넘치는 어여쁨으로 보이기 시작했다네/ 병신춤이라니!/ 검은 눈동자를 흰 자위 위에 마주 세우고/ 사지는 비틀려서 뿌리몸짓으로 비틀거리며,/ 비틀비틀 넘어질듯 걸어가며…/ 마파람에 갈 곳 모르는 민초들처럼/ 수양버드나무 가지처럼 흔들리면서도/ 끝내는 제 길을 내던/ 藝人!/ 성한 병신으로 부끄럽지 않아도 좋을 부끄러움으로/ 병든 세상, 모르는 부끄러움을/ 되게 가르치던 몸의 웅변/ 혹은 낮춤의 달인!/ 안다는 것은 그러므로 가갸거겨 소리만 요란한/ 맹꽁이들이 노는 무논이 아니고/ 아닌 것이고/ 그저 몸의 양식만은 아닌/ 신명으로 사흘 굶은 시어미상 몸주에게/ 넉살좋은 짓거리를 한 상 잘 차려내는 것이라네/ 한 끼 양식으로 배를 채워주는/ 인연 같은 것이라네/ 그런 것이라네// 온고을 한밭식당 싸구려밥집에서/ 내가 얻어먹은 遭遇/ 뜨신 밥 한 그릇 같은 것이라네.>-이동희「병신춤-1인창무극의 예인, 공옥진 여사의 서거에 붙임」전문
 
춤은 몸의 언어라고 한다. 공옥진 여사가 평생을 기울여 하고 싶었던 몸의 언어는 무엇이었을까? 결국은 몸의 양식인 밥 한 그릇에 담긴 인정처럼, 따뜻한 피가 도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 아니었을까? 1인창무극 <병신춤>의 선구적 예인 공옥진 여사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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