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흐르듯, 바람 불듯 풍류는 인생 같은 것
물 흐르듯, 바람 불듯 풍류는 인생 같은 것
  • 조석창
  • 승인 2015.01.22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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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가난한 집서 태어나 중학교때 은사만나며 시조와의 인연맺어 평생 배푼덕은 없는데 입은 덕은 많아 가람선생 만남은 큰 덕 슬픈 恨도 중요하지만 풍류도 민족정신중 하나 풍류서 문학찾아야
▲ 한국의 전통가치를 계승하고 현대적 삶의 정신적 이정표로 선비정신을 구현하고 있는 고하(古河) 최승범 시인. /김현표기자

“한 대 펴” 불

쑥 담배 한 개비를 건넨다.

불까지 붙여줄 요량이다.

우물쭈물 담배를 받았지만 손으로 뭉개고 말았다.

속으론 어찌나 아깝던지.8년 전, 고하古河 최승범 시인과 첫 대면은 이렇게 시작됐다.

신문에 게재할 원고를 받으러 가는 날이었다.

시인은 컴퓨터를 사용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아니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게다.

아직도 원고지에 한 자 한 자 또렷하게 손으로 글을 쓴다.

인터넷에 각종 정보가 오가는 시절, 일주일에 한 번 원고를 받으러 직접 시인을 찾아야 했다.

시인은 원고를 쉽게 내주지 않았다.

완성된 시를 함께 읽어보며 수정과 수정 끝에 어려운 탈고를 한다.

미처 준비되지 못한 날은 시가 완성될 때까지 옆에서 꾸벅꾸벅 졸기도 했다.

그때마다 내미는 담배는 정말 고역이다.

연배가 많은 분과 담배를 피우는 것은 상상도 못한 일이다.

시인은 담배를 음식으로 비유했다.

밥 한 끼 같이 먹는데 나이가 무슨 대수냐는 것이다.

희한한 논리에 결국 불을 붙였지만 몇 모금 피지 못한 채 꺼야만 했다.

그래야 옳은 것 같아서다.

오랜만에 방문의사를 전했다.

쾌히 승낙의 답이 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오늘 온다 해서 점심 약속을 메모해놨지. 그렇지 않으면 자꾸 잊어버리게 돼”며 일행을 맞는다.

시인은 남원 사매면 서도리 최씨 집성촌 출신이다.

500년 가까이 집안 대대로 이곳에 거주했다.

할머니 산소가 이곳에 있다.

명절 때 구례에 있는 부모님 산소에 들린 후 서도리에 들려 할머니를 뵙고 온다.

‘이제 상놈이 다 됐다’고 푸념하는 이유다.

그 시절 누구나 그렇듯이 시인은 찢어질 듯이 가난한 집안에서 자랐다.

할머니는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장손 공부를 시키지 못함을 안타까워했다.

순창의 고모댁에 거주하며 학교를 다녔다.

교장 선생의 관심 덕택에 남원에서 학창생활을 보내기도 했다.

시인이 시조에 심취하게 된 것은 중학교 때 선석렬 선생 덕택이다.

선 선생에 의해 처음 접하게 됐고, 듣는 순간 시조의 매력에 빠지게 됐다.

본격적 공부는 대학에서 가람 이병기 선생과 만남에서 시작된다.

당시 가람은 6.25 전쟁 후 공산주의라는 학생들의 반발로 전주에 머물렀다.

대학에서 만난 가람은 문학이론과 시조에 정통한 인물로 시인에겐 흠모의 대상 뿐 아니라 인생의 큰 행운이었다.

“나는 평생 베푼 덕은 없는데 입은 덕은 많다”고 말하는 시인에게 가람과의 만남은 입은 덕 중 가장 큰 덕이다.

시인은 가람을 통해 시조를 알게 되고 문학을 알게 됐다.

시조와 호흡이 맞아 떨어짐을 이 때 알았다.

공부할 책이 없어 전전긍긍할 때 가람은 시인에게 선뜻 책을 내줬다.

어린 제자가 훗날 전북문학의 한 축을 담당할 것을 예상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시인은 “결혼할 때 이병기 선생님이 주례를 섰다.

나로선 아버지와 같은 분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1968년 가람은 세상을 뜨기 전 제자에게 마지막 선물을 줬다.

종이 한 장에 친필로 ‘자네 생각나는 데로 하소’가 적혀 있다.

학문에 대한 소신을 마음껏 펼쳐라는 제자에 대한 깊은 애정이 담겨 있는 글귀다.

이제는 낡고 변색된 종이로 변했지만 시인에겐 세상 무엇보다 바꿀 수 없는 보물 중의 보물이다.

또 한 명의 스승은 신석정 선생이다.

 

 


 

장인이면서 학문적 스승인 석정 선생과의 만남은 또 하나의 입은 덕이다.

석정 선생에겐 시론을 배웠다.

1958년 현대문학에 시 ‘설경’ 등으로 등단했을 때 추천은 김동리 선생이었지만 그 이면엔 석정 선생이 있었다.

석정 선생을 이야기 할 때는 자연스럽게 결혼이야기로 이어진다.

어느날 부안에 있는 석정 선생집을 간 시인은 정원에 서 있는 큰 딸과 시선이 마주치게 된다.

바로 시선을 돌렸지만 그 때 생긴 묘한 감정은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가람 선생과 부친도 반대하지 않아 교제가 시작됐다.

막 국화꽃이 필 무렵으로 시인은 기억한다.

시인을 논할 때는 풍류가 떠오른다.

그는 대학교수 시절 풍류에서 문학정신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슬픈 한도 우리의 정신 중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지만 풍류 역시 한민족을 대표하는 정신 중 하나라는 게다.

그는 “우리 문학의 특징 중 하나가 한이지만 또한 멋진 풍류가 있다.

넓고 넓은 범위에서 한에만 한정짓지 말자. 풍류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풍류에 관한 글도 많이 썼다”며 “풍류는 물 흐름이고 바람 흐름이다.

억지가 없다.

내 인생도 이렇게 살고 싶고 앞으로도 그렇다.

억지로 끌고 가면 되는 일도 안되는 법이다”고 말했다.

최근 출시된 ‘시조로 본 풍류 24경’이 그 완결판이다.

또 하나 떠오르는 것이 선비정신이다.

고향에선 시인 일가를 깨끗한 벼슬이란 뜻의 한림집이라 불릴 정도다.

그는 등단 이후 줄곧 선비정신을 주장해 왔다.

요즘말로 하면 지성인 정도로 해석될 수 있다.

부족한 게 많다며 선비라 불리는 게 부담스럽다고 하지만 그의 방엔 옛 선비방에서 볼 수 있는 고비가 있다.

고비는 옛 선비가 받은 편지와 글씨 등을 보관한 꽂이를 말한다.

그의 방의 고비는 평생 보낸 편지와 받은 편지를 보관하고 있으며, 일종의 X파일인 셈이다.

등단부터 현재까지 박목월, 김동리 등 시인들과 내왕한 편지들을 비롯해서 평생 동안 주고받은 편지파일들이 꼼꼼하게 정리돼 있다.

 

 


 

책으로 발간하기 위해 몇 년전 3박스의 편지를 서울 출판사에 보낸 적이 있는데 출판사 사정으로 책이 나오지 못하고 있다.

말 꺼낸 김에 편지를 찾으러 서울 나들이에 나서야겠다는 그의 모습은 영낙 없는 선비 모습 그 자체다.

세상과 타협을 불허하고, 물질을 멀리하며, 오직 문학세계에만 정진해 온 그의 모습은 예를 알고 도를 지키는 그 자체다.

시인은 전북에서 태어나 전북에서 활동했고 또 전북을 떠날 계획이 없다.

‘다시 태어나도 내 고향에서 태어나고, 다시 학교를 다녀도 같은 학교를 다니고 싶다.

모자란 것은 채워나가며 후회 없는 삶을 살았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정년 퇴임사를 그는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몇 년전 시인은 몸이 아파 큰 고생을 한 적이 있다.

그토록 사랑했던 담배도 끊었다.

가끔 고하문학관을 방문하는 청곡 선생을 따라 마시는 가시오가피주 세 잔이 전부다.

우체국과 집을 오가며 30분 씩 산책 삼아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고하문학관은 지난 1997년 중학교 동창의 도움으로 신용금고 4층에 둥지를 틀었다.

2010년엔 전주한옥마을로 자리를 옮겼다.

문학관은 항상 사람들로 붐빈다.

책을 새로 낸 사람, 말동무 차 들른 사람, 출판사 관계자 등등 다양하다.

이곳은 시인의 집필실이면서 문인들 사랑방, 자료실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과거 동사무소 건물을 전주시가 제공했고 시인의 호를 따 고하문학관으로 명명됐다.

문학관을 알리는 현판 글씨는 당시 송하진 전주시장이 직접 써 화제를 낳기도 했다.

이곳엔 3만여 권의 장서를 비롯해 시인이 가장 아끼는 ‘전북문학’이 소장돼 있다.

과거 문학지가 일천한 시절, 시인은 동인들과 함께 사비를 털어 1969년 전북문학을 만들었다.

올해로 46년 째 발간되는 전북문학은 신석정, 최승범, 박병순 등 전북지역 문인 뿐 아니라 일본과 중국의 시인들 시들을 실어왔다.

전북문학은 전북문학계의 살아 있는 역사이며 시인의 문학인생과 함께 한 셈이다.

지난해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전북대 박물관에서 ‘전북문학, 시와 그림을 담다’는 특별전시가 진행된 바 있다.

전시는 당시 267호까지 간행된 ‘전북문학’과 수록시, 표지그림으로 쓰인 미술작품이 선보였다.

장장 267권에 달하는 분량이다.

그는 소문난 미식가다.

문학관 인근에 새로 생기는 식당은 호기심을 자극한다.

동행은 그 날 그 날 문학관을 찾은 지인과 함께한다.

행여 음식에서 주인의 성의가 부족하다 싶을 땐 여지없이 주인장을 부른다.

외면하고 다시는 발걸음을 하지 않으면 그만일 것을 조목조목 따진다.

타협을 모르고 살아왔던 그로선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중요한 문제인 셈이다.

음식에 관심을 둔 이유는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중앙에서 내려온 관료는 지방수령을 이기지 못하고 지방수령은 아전들을, 아전들은 기생들을 넘지 못한다.

하지만 이들보다 높은 것은 음악이고 음악 역시 음식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음식은 우리네 삶과 직결돼 있고 삶은 곧 시이며 문학의 중요한 부분인 셈이다.

반세기가 넘는 시인의 작품세계를 몇 글자로 평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하여 전북대 양병호 교수의 말을 빌어보자. 양 교수는 시인을 ‘아리잠직’하다고 표현했다.

아리잠직은 온화하고 솔직하며, 키가 작고 모습이 얌전하며 어린 티가 있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수긍이 간다.

양 교수는 “고하 최승범은 시조, 수필, 문학연구 등 작업을 왕성하고 끈질기게 수행해 오면서 한국의 전통가치와 문화를 계승하고 부박한 현대적 삶의 정신적 이정표로 선비정신가치를 내세우고 있다”며 “놀랄 만큼 보기 드문 고하의 선비적 삶은 선비정신을 그대로 구현하고 있고, 이런 고하의 삶의 자세는 당연히 시로 형상화되고 있다”고 평했다.

이어 “시의 완성도는 시어의 선택에 달려 있는데 고하는 시어에 대해 예민하고 섬세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며 “시어에 대한 고민에 리듬 즉 음악성을 갖춘 미학적 완성도는 언어미학적 완결성의 끝을 보는 것과 같다”고 밝혔다.

볼펜을 내려놓고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사람들이 부르기를 교수와 시인, 선생과 관장을 혼용하고 있다.

어느 것이 제일 맘에 드느냐”고 묻자 ‘선생’이란 답이 돌아온다.

제일 흔한 말이면서 가장 높은 말이란 것이다.

“나는 선생이 좋은데 자꾸 교수님이라 부른다.

그러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중요한 거 아니니 내버려 두지 머.”

 

/조석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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