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회말 역전우승처럼 도민에 짜릿한 희망打
9회말 역전우승처럼 도민에 짜릿한 희망打
  • 박정미
  • 승인 2015.02.26 19: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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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런왕 김봉연교수 야구인생과 인생 2막
▲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받은 사랑을 갚는 길이라는 '한국프로야구 원년 홈런왕' 김봉연 교수./김현표기자

어느덧 60대를 넘어선 김봉연. 20~30대 그는 지금은 사라진 ‘해태타이거즈’스타이자 호남인들의 자존심이었다. 나아가 애환과 긍지를 지켜주던 희망이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야구를 볼 때마다 그를 떠올린다.
김봉연 선수가 배트를 휘두르면, 공은 여지없이 하늘로 솟아 외야에 떨어지지 않고 긴 포물선을 그으며 펜스를 넘어가곤 했다. 방망이 하나로 숨 막히는 긴장과 희열, 탄성을 자아내게 했던 순간들이다.
정치적.사회적 소외의 시기인 80,90년대. 험한 세상 한 가운데서, 펼쳐줬던 그의 활약은 응원을 빚대 목청껏 소리를 지르며, 도민들은 고통스러움과 답답함을 시원하게 해소시켜 주곤 했다.
그의 야구 인생은 같은 시대를 살아온 암울했던 지역민들에게 꿈을 대신 이뤄나가는 삶의 위안이었던 것이다.고교시절에는 군산상고 ‘역전의 명수’ 주역으로 호남야구의 발전을 이뤘고, 아마추어 시절에는 3번의 3연타석 홈런의 신기원을 이뤄냈다. 특유의 어퍼스윙은 프로야구 초반 당시 상대 투수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 자신만의 스윙으로 22개 홈런을 기록, 프로야구 원년 홈런왕이 됐다. 1988년 해태 유니폼을 벗던 순간까지 부동의 4번 타자였던 한국 야구의 진정한 레전드. 그의 기록은 우리의 영웅답게, ‘홈런왕’으로 끝나지 않는다.
프로야구 선수 출신 중 최초로 대학 전임교수가 됐다. 정들었던 야구계를 은퇴하고 2001년 충북 음성군 극동대 겸임교수로 시작, 현재까지 같은 대학 사회체육학과 학과장으로 재직 중이다.
장수가 명검을 휘두르듯 배트 하나로 시대를 주름잡던 홈런왕 김봉연 교수를 만나 그의 야구인생과 최근 근황에 대해 들어봤다. 인터뷰는 지난 24일, 극동대학교 연구실에서 진행됐다.
/편집자주

 

김봉연은 전북 전주시 전동에서 11남매(7남 4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위로 다섯, 아래로 다섯, 형제가 많은 대 식구 속에서 형들이 물려주는 옷과 양말을 물려받으며 여느 아이들처럼 유년기를 보냈다.

아버지 사업이 왕성했던 탓에 집안에는 항상 3~4명씩 일꾼들까지 북적거렸고, 안방, 건넌방, 사랑방까지 여섯 개나 되는 방에서 11남매 형제들은 풍족하게 살았다.

사업은 그런대로 됐으나 딸린 식구가 많다 보니 살림은 항상 쪼들렸다. 코흘리개 시절부터 야구와 축구를 무척 좋아했다. 유별난 개구쟁이였던 그는 6남매 틈바구니에서 어렵게 성장했다. 다섯 살 무렵에는 야구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사고를 당한다

그렇다면, 왜 야구를 시작하게 됐을까?

중앙초등학교에 입학했던 그는 당시 아이들보다 2살 늦게 학교에 들어갔다. 10살이 돼서야 입학을 했는데, 그래서인지 같은 학년 아이들보다 키가 컸고, 운동도 잘했다.

두 살 위인 형이 야구를 했던 터라, 학교가 끝나면 형을 기다렸다가 함께 집으로 돌아오곤 했는데, 3학년 가을 그에게도 목표가 생기게 됐다.

 

[야구를 하면, 매일 자장면을 먹을 수 있는 줄 알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일이다.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에 들어간 형을 기다리던 중 창문 사이로 형이 야구부 선수들과 자장면을 먹는 모습을 목격했다. 순간 ‘아! 나도 야구를 하면 맛있는 짜장면을 매일 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다음날부터 운동장을 서성거렸다. “공이 그라운드를 벗어날 때마다 코치 선생님에게 던지기 시작했지. 나를 좀 봐달라는 소극적 신호였는데, 다행히 선생님 눈에 들어 테스트를 시켜 보더니 받아주시더라고.”

멋쩍은 듯 너털웃음을 짓던 김봉현은 이내 “큰 키와 빠른 발, 힘이 장사였던 팔 덕분에 처음부터 후보라는 걸 경험하지 않고 주전으로 활동했다”며 지난날을 자랑스럽게 회고했다.

4학년 때부터 투수로 활약했는데요. 연습 때마다 ‘옥수수빵’이 간식으로 나왔다. 자장면은 경기가 끝나면 사줬는데, 부잣집 아이들도 맘대로 사 먹지 못하던 시절, 야구에 흠뻑 빠질 수 밖에 없는 원동력이었다.

5학년 때 개최된 전북 초등학교 야구대회에 전주시 대표로 선발돼서는 3연타석 홈런 기록을 처음으로 세웠다.

“덕진 야구장에서 열린 대회였는데, 외야 펜스가 없던 시절이라 타자가 1, 2, 3루를 돌아 홈으로 들어온다고 해서 ‘그라운드 홈런(장내 홈런)’이라고 했다. 현재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전주시 대표로 함께 뛰었던 이들은 모두 안다.” 첫 홈런의 경험을 자랑스럽게 회상했다.

이후 김봉연은 ‘전주북중’에 진학했고, 3학년이 되자 어느 날, 제일 큰 형님이 군산남중에서 등록금 면제, 기숙사 제공 등을 제시했다며 가족회의를 열었다. 11남매가 북적이는 집을 벗어날 최고의 기회였기에 그는 망설일 것 없이  “예, 무조건 갈게요!”라고 대답했고, 군산이 제2의 고향이 됐다.

군산남중 졸업을 앞둔 그에게 선린상고, 대구상고, 경북고 등 전국 각지 우수 고교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온다. 하지만 그는 군산상고를 선택했다.

 

[미래의 홈런왕 예고]

김봉연은, 군산상고가 대한민국 고교야구 역사상 가장 흥미진진한 드라마를 연출하면서 정상을 차지하는 데 주역이 됐다. 1972년 7월 19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제26회 황금사자기 부산고와의 결승 9회 말 역전 우승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같은 해 10월에는 전국 우수고교초청 군산상고-배명고 경기에서 장쾌한 아치를 그리는 두 개의 홈런을 작렬, 팀을 승리(4-0)로 이끌면서 미래 ‘홈런왕’을 예고케 했다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는 1972년 7월 황금사자기 우승에 이어 9월 대구에서 개최된 국회의장배 쟁탈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강팀들을 물리치고 패권을 차지, 그 해 2관왕에 오른다.

군산상고 에이스 김봉연은 대전고와의 결승에서 1회 초 1점만을 내주는 호투로 역전승(4-1), 최우수선수상을 받으면서 대학과 실업팀 감독들이 모두 욕심을 내는 정상급 투수로 자리매김한다.

“3학년이 되자, 대학과 실업팀 등, 여러 곳에서 스카우트제의가 들어왔다. 당연히 실업팀을 마음에 두고 있다가 영어교사였던 큰형의 말 한마디에 대학으로 진학했는데, 길게 보니 현명했던 선택이었다.”

연세대 대학야구에 합류해서도 그는 신기에 가까운 기량을 펼쳤다. 신입생이 전국 대학야구연맹전 춘계리그에서 ‘연세대 영원한 맞수’라는 고려대를 상대로 ‘노히트노런’을 이룬다. 투구에 얼마나 몰두했는지 자신이 새로운 기록을 세우는 것조차 몰랐을 정도였단다.

김봉연은 1973년 가을 또 하나의 대기록을 세우는 기염을 토한다. 그 해 대학 추계리그연맹전 동아대와 경기에서 대학야구 사상 최초로 3연타석 홈런을 기록하며 홈런왕을 차지한다.

이어 1974년 대학야구 추계리그 홈런왕, 1975년 아시아선수권대회 홈런왕, 한국화장품 소속 3년(79~81) 연속 홈런왕에 올랐다. 프로야구 원년(1982)을 합하면 4년 연속 홈런왕에 등극한 셈이다.

육군야구단 시절인 1975년 백호기쟁탈 전국야구대회에서도 한전과 건국대를 상대로 3이닝 연속 대형 아치를 그리면서 대망의 두 번째 3연타석 홈런을 달성했다. 홈런왕에 타점왕까지 차지하면서, 거포의 진면목을 보여줬던 그의 3연타석 홈런은 그 해 5월 20일 한전과의 경기에서 9회를 홈런으로 장식한다. 21일 건국대와 경기에서 1회 말 최한익과 랑데부 홈런, 3회 말 솔로 홈런을 쏘아 올려 팀 승리(4-2)에도 이바지한다.

 

[태극마크와 프로의 세계]

대학에 들어서면서부터 일찌감치 국가대표 후보로 선발됐던 김봉연은 1973년부터 1981년까지 대학과 실업팀을 거치면서 계속 태극마크를 달았다. 또한 1973년 ‘노히트노런’을 시작으로 만루 홈런, 연타석 홈런, 3연타석 홈런 등 홈런의 대명사가 되면서 한국 야구사에 전설로 불리기 시작했다.

한국 야구의 세계무대 진출은 1975년 9월 몬트리올 대륙간컵 쟁탈 야구대회가 처음이었다. 당시 8개 팀이 참가한 이 대회에서 한국은 3승 4패로 공동 4위에 머물렀다. 11개 팀이 참가했던 1976년 11월 콜롬비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는 5승 5패로 공동 5위. 그리고 1977년 대륙간컵 대회에서 세계정상을 정복한 것이다.

김봉연은 당시 국제경기에서 더, 강한 선수로 화자 되기까지 했다.

그러던 중 김봉연은 1982년 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해태 타이거즈(현 KIA)에 입단한다. 당시 나이 31살. “선수로는 적잖은 나이였다. 2년만이라도 뛰어보자는 생각에 프로를 선택했는데, 7년을 뛰었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해태 타이거즈 초대 주장 김봉연은 1982년 1월 30일 창단식과 더불어 2월부터 광주, 전주, 군산, 이리, 여수 등을 순회하며 훈련에 들어갔다. 그러나 3월 부산 구덕야구장에서 롯데와 가진 개막전에서 2-14로 호된 신고식을 치렀다.

김봉연은 설상가상으로 4월 해태-롯데 부산경기에서 발목이 부러지는 부상을 당한다. 발목에 깁스를 하고 몇 게임 결장하는 사이 백인천, 김우열, 이만수, 김성한 등은 계속 홈런포를 쏘아 올렸다.

개인 기록이 곤두박질 치는 순간 붕대로 칭칭 감은 다리를 만지면서 구경만 해야 했던 당시 심정은 그야말로 참담했다.

그러던 중 기회가 찾아왔다. 4월 해태-삼미 경기에서 9회 초 공격 때 주장 권한으로 대타를 자청한 것이다.

해태가 9-2로 앞선 상황에서 홈런을 날리며 빛은 나지 않았으나, 발목에 깁스하고도 근성을 보여줬던 김봉연이 다리를 절면서 힘겹게 홈인하는 모습은 관중들의 심금을 울렸다.

근성을 보여줬던 김봉연은 그 해 22개 홈런을 작열시키며 프로야구 원년 홈런왕에 오르기도 했다. 1979~1981년 연속 홈런왕을 차지했던 그는 아마추어와 프로시대를 관통하는 홈런타자가 됐다.

“그럼에도 가장 잊혀지지 않은 순간은 해태타이거즈가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했던 1983년이었단 말이지.”

해태 타이거즈는 1983년 10월 20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벌어진 코리안시리즈(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MBC 청룡을 8-1(4승 1무)로 누르고 낙승, 한국 프로야구 2대 챔피언으로 등극한다. V9에 빛나는 ‘해태 왕조’가 시작된 것이다. MVP는 야구기자단 투표에서 5게임을 통해 19타수 9안타(4할 7푼 4리) 8타점을 올리면서 맹활약한 김봉연이 차지했다.

 

[야구를 하면서도, 영어책은 절대 놓지 않았다]

김봉연이 군산상고에 입학하던 1970년대는 누구에게나 배고픈 시절이었다. 그런 탓에 식욕이 왕성했던 운동선수들에겐 ‘배고픔’이 가장 큰 적이었다고 한다.

“그래도 전국대회 본선에 진출하면 고기를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예산을 아끼기 위해 최소 인원만 시합에 나가면서 함께 고생했던 동료들과 같이하진 못했지만, 시합을 손꼽아 기다렸다”며 고달팠던 시절을 떠올렸다.

김봉연이 군산상고에 와서, 가장 의아했던 것이 야구선수들의 수업 불참이 당연시됐던 풍토였다.

전주에서는 야구를 하면서도 수업을 들어야 했고, 인생의 멘토였던 큰 형님 역시 ‘야구를 해도 영어책을 절대 손에서 놓지 말라’는 당부가 있었기에 수업을 빠지지 않았다.

그럴때면 선생님들은 ‘이상한 녀석’이라며 의아해 하곤 했다. 그래도 그는 영어수업만큼은 절대 빼먹지 않으려 노력했다. 낮에는 훈련을, 밤에는 타격연습과 책도 열심히 읽었다.

군산상고 졸업을 앞두고 대학과 실업팀 러브콜이 쇄도했을 때도, 김봉연은 큰 형의 조언에 따라 연세대학교에 진학해 교직과정을 이수하기도 했다.

이 같은 학구열은 은퇴 후 그를 극동대 교수로 변신시키는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석사학위까지는 있었지만, 야구 판에서만 있던 사람이라 바로 정식교수가 될 수는 없었지요. 첫 해에는 겸임교수로 강의만 하다가 2002년에 조교수가 돼서 2004년까지 있었고, 2005년에 정교수 발령을 받아서 현재는 홍보실장과 체육학과장을 맡고 있습니다.”

매사에 책을 놓지 못했던 그의 습관이 자연스레 교단과 이어준 것이다.

후배들과 만날 때 면 공부와 병행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해주곤 하지만, 실행에 옮기는 이가 없어 내심 섭섭하다는 속내도 밝혔다.

 

[후회는 없었지만, 아쉬움은 있다]

김봉연은 선수로는 최고 몸 값을 올렸지만, 프로감독을 한번도 맡지 못했다.

“아무래도 후배를 가르치는 지도자로서는 소질이 없다고들 생각했던 것 같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프로선수로서의 7시즌 통산기록은 630게임 출전에 2천145타수 596안타(홈런 110개, 3루타 8개, 2루타 84개, 단타 394개), 타율 2할7푼8리, 타점 334, 득점 311.

김응용 감독을 보필해 타격코치로 시작했으나 1989시즌부터 해태를 떠난 2000시즌까지의 12시즌 동안에도 현역시절에 못지 않은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발휘해 후배들이 5차례(89, 91, 93, 96. 97 시즌)나 국내 프로야구의 정상에 오르는데 밀알이 됐다.

선수로 4차례, 지도자로는 이보다 하나가 많은 5차례나 팀을 우승으로 이끄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럼에도 2000년 시즌을 마치고 김응용 감독이 삼성 라이온즈 감독으로 이적해 공석이 된 감독 자리에 김봉연은 앉질 못했다. 오히려 그의 후배인 김성한이 구단으로부터 낙점을 받았다.

 “강산이 변하고도 한참 된 일이니 감정은 없으나, 그 순간 심정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었다”고 소회했다.

야구 선수로, 지도자로, 또 교육자로 살아오면서 정말 많은 분들로부터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왔다고 자부하는 그는 “은혜를 다 갚는 길은 지금 제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 생각한다”며 “고향에서 야구에 대한 좋은 소식이 들린다면 언제나 달려가 함께 축하해주고 싶다.”는 속내도 밝혔다.

 

김봉연 교수 약력

▲생년월일 : 1952년 1월13일
▲출신학교 : 전주 중앙국민학교-전주 북중-군산상고-연세대-원광대(석사)-동신대(박사과정)
▲야구시작 : 중앙국 4년
▲아마 주요성적 : 제52회 전국체전 우승(1971년) 제26회 황금사자기 고교대회 우승(1972년) 제11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우승(1975년) 니카라과 대륙간컵 대회 우승(1977년) 제26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준우승(1980년)
▲프로 주요성적 : 한국시리즈 우승 4차례(1983, 86, 87, 88년ㆍ이상 해태) 1982ㆍ86년 홈런왕, 86년 타점왕
▲지도자 성적 : 해태 코치로 한국시리즈 우승 5차례(1989, 91, 93, 96, 97년)
▲좋아하는 음식: 육류
▲야구 외 즐기는 운동 : 골프(비거리 300야드)\

 

 

/박정미기자 jung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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