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법종 우석대학교 교수

2015년 7월 공주, 부여, 익산지역 8군데의 백제역사유적지구가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면서 2000년 경주, 2004년 북한의 고구려 고분벽화와 함께 삼국시대 역사유적이 모두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제 백제의 역사와 문화가 세계유산으로 자리잡아 명실상부하게 세계사적 반열에서 주목받게 된 것이다.

세계유산은 1963년 이집트 아스완댐건설에 의해 수몰될 위기에 처했던 아부심벨유적을 옮긴 후 1972년 유네스코가 인류가 공동으로 보존하고 후손에게 전해주어야 할 문화 및 자연 유산을 세계유산으로 선정하고 보호하기 시작한 이래 1만여 곳이 지정되었다.

세계유산은 유적의 진정성과 완전성 그리고 탁월성이 전제된 것으로 세계유산이 되었다는 것은 인류의 공동자산으로 전 세계인류가 함께 보호할 문화유산이 되었다는 것이다.

백제(百濟)는 동아사아 해양을 누린 대표적인 해양 국가였다.

백제라는 명칭은 일백 백(百)에 건널 제(濟)를 사용하고 있지만 백제의 나라이름이 정해지는 과정은 건국신화에 3단계의 변화를 보이며 나타나고 있다.

가장 먼저 중국 기록인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맏형 백(伯)자를 쓰는 백제(伯濟)가 마한의 여러 나라 가운데 하나로 소개되었다.

그리고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는 시조인 온조가 형 비류가 미추홀(인천) 지역으로 간 후 한강 남쪽에 열 명의 신하와 함께 나라를 세웠다하여 이름을 십제(十濟)로 정했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리고 미추홀로 갔던 비류가 죽자 그를 따랐던 세력이 동생 온조와 합쳐지면서 나라이름을 백제(百濟)로 바꾸었다고 한다.

즉 백제라는 나라이름은 백제(伯濟)-십제(十濟)-백제(百濟)로 바뀌었는데 여기서 보면 이름의 앞 글자만 으뜸 백(伯)-열십(十)-일백백(百)으로 바뀌고 뒷부분의 제(濟) 글자는 계속 유지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변하지 않은 글자, 제(濟)는 건너다, 건지다라는 동사적 의미와 함께 명사로 나루터 즉, 포구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백제라는 나라 이름은 으뜸이 되는 포구 국가-열 개 포구국가-백 개의 포구 국가로 변한 것이다.

이는 결국 백제가 한강, 예성강, 임진강과 서해안의 포구를 중심으로 성장해 나간 해양국가임을 극명하게 표현한 나라이름임을 보여주었다.

결국 백제라는 이름만 살펴봐도, 당시 서해를 중심으로 중국-한국-일본을 연결하는 동아시아 해양거점의 국가로 성장했음을 알 수 있다.

즉 바다를 통해 중국의 요서지역도 진출하였고 남중국과 일본에도 진출해 동아시아 해양대국으로 성장한 나라가 백제였다.

이같은 특성을 가장 잘 보여준 것은 백제의 수도가 한강, 금강 등 모두 바다로 진출할 수 있는 해상교통중심지에 위치한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그런데 대부분 백제의 역사공간은 안타깝게도 잘 보존되지도 보호받지도 못했던 아픈 역사를 갖고 있다.

즉, 백제의 역사는 수도를 기준으로 한성시대(B.C18-475), 웅진시대(475-538), 사비시대(538-660)로 나누는데 500여년에 가까운 한성 즉 현재의 서울지역 백제유적이 이번 등재에서 빠졌다.

이는 상대적으로 서울의 유적공간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기에 미흡함이 있었던 것이다.

그 가장 큰 이유가 유적의 성격과 내용이 온전히 보존되고 파악되어야 했는데 서울의 유적들은 근대화와 서울의 확대과정에서 파괴되고 방치되었었다.

특히, 풍납토성의 경우 한강변에 위치하여 백제왕성으로서 가장 가능성이 높은 공간이지만 성벽만 사적으로 지정되는 바람에 성 내부공간은 주택이 들어서고 1990년대 아파트 재개발과정에서 경당지구 등 일부만이 발굴 조사되어 그 실체가 확인되지 못한채 이번 세계유산 등재에서 제외되었다.

또 석촌동고분군도 그 성격 등이 제대로 부각되지 못해 누락되었다.

한편, 공주는 백제의 피난수도로서 기능하였고 부여는 백제역사를 정비한 성왕에 의해 새롭게 마련된 곳이지만 백제왕궁유적으로 파악된 관북리에 조선시대유적과 1960년대 박물관유적이 근대 기념물로 지정되는 바람에 그 완벽한 면모를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이들 공간과 달리 익산지역의 역사유적은 그 보존상태와 주변 공간여건이 이미 도시화된 이들 지역과는 달리 원형성을 가장 잘 남겨진 공간이다.

즉, 익산지역의 왕궁리 유적은 백제 후기 왕궁으로, 동아시아인들이 왕궁 건설의 원리와 기술을 활발하게 교류하고 공유했음을 보여주고, 미륵사지는 우리나라 불교 건축을 대표할 수 있는 유적으로 뛰어난 공예기술과 백제인의 미적 감각을 함께 엿볼 수 있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익산지역 유적 가운데 이번 등재에서 누락된 몇몇 곳이 있었다.

즉, 쌍릉은 백제후기 왕릉유적의 면모를 잘 나타내고 있으며 무령왕릉에서 나온 관재와 동일한 일본산 금송으로 만들어진 관재가 일부 남아 그 역사성과 국제성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제석사지의 경우 수도에 건립된 국가사찰 성격의 사찰로서 중국기록인 ‘관세음응험기’ 기록과 연결되며 석불사 석불의 경우 양식에서 일본 법륭사 불상과의 연결성 등에 의해 세계유산으로서의 자격이 충분한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전라북도는 미륵사지유적과 왕궁리유적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것에 만족하지 말고 서울의 백제유적 추가 등재지와 연결지어 해양대국으로서 백제가 익산에서 마지막으로 이루었던 ‘백제중흥의 땅 익산’에 부응하는 세계유산 추가등재와 전라북도 전체로 확산된 백제의 역사문화역량을 극대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특히, 전라북도차원에서 백제부흥전쟁의 마지막 거점인 주류성과 동아시아세계대전의 공간인 백강구전투의 무대에 대한 학술적 정리와 국제적 홍보가 필요하다.

이는 단순히 세계유산차원이 아닌 동아시아사적 관점에서 백제를 재조명하는 것으로 매우 큰 의미가 있다.

또한 백제를 부활시킨 후백제 역사공간 발굴과 역사적 의미에 대한 재평가사업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백제를 중흥시킨 익산과 백제를 부흥시킨 부안변산 그리고 백제를 부활시킨 전주를 망라한 르네상스 백제의 땅 전라북도를 진작시키는 관심과 노력이 요청된다.

한편, 이같은 일을 추진할 ‘르네상스 백제프로젝트’가 구상되고 이를 중심으로 일회성 대응이 아닌 중장기 발전 전략의 관점에서 우리 지역 발전의 큰 원동력을 삼아야 한다.

 



/ 조 볍 종 우석대교수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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