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자가 인(仁)을 물으니 공자는 ‘사욕을 이겨 예에 돌아가는 것(克己復禮)’이라고 대답했지요. 다시 그 구체적 조목을 다시 물으니 ‘비례물시 비례물청 비례물언 비례물동’이라고 했습니다.

주자의 주석을 살펴보면 ‘물(勿)은 금지하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해석하면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동하지 말라’고 할 수 있지요.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예란 천리(天理)의 절문(節文)입니다.

낮이 있으면 밤이 있고 여름이 있으면 겨울이 있는 것과 같이, 천리에 마땅한 자리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움직이지도 말라는 말입니다.

요약하면, 인에 이르기 위해서는 사욕을 이겨 예에 회복해야 하는데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말라는 것이죠. 그런데 이 말이 궁극적 결과라면 이는 유학의 기본정신에 위배됩니다.

유학이란 심중에서의 깨달음만을 얻고자 하는 학문이 아닙니다.

깨닫는 것도 중요하지만, 깨달은 바대로 생활에서 실천하는 것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는 학문이니까요. 비록 뼈아픈 현실 속에서 살아가더라도, 그 상황을 인정하고 그 상황 속에서 가장 옳고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행동하자는 것이 유학입니다.

《중용(中庸)》의 첫 장을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옵니다.

기뻐하고 성내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감정이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를 중이라 하고, 그런 감정이 다 나오면서도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라고 하니, 중은 천하의 큰 근본이고, 화란 천하 최고의 도이다.

(喜怒愛樂之未發을 謂之中이오 發而皆中節을 謂之和니 中也者는 天下之大本也오 和也者는 天下之達道也니라)   중(中)이란 편벽되고 치우친 바가 없는 깨달음이 일단 내 마음에서 얻어진 자리를 말합니다.

고요한 상태(靜)에서 태극의 자리입니다.

불교의 참선이나 유교의 정좌는 모두 이 자리에 이르고자 함이죠.그러나 그 다음 단계인 화(和)는 중(中)을 바탕으로 이미 움직여 버린 상태(動), 즉 우리가 행동하고 말하는 모든 일상에 딱딱 맞아떨어지게 적용된 한 차원 높은 개념입니다.

따라서 화의 단계에 이르기 위해 중이 필요한 것이지, 그저 중만으로는 개인의 안심상락(安心常樂: 마음이 편안하여 항상 마음이 즐거운 것)이나 가능할 뿐 사회나 국가에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대학》에 ‘대학의 도는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며, 지극한 선에 그침에 있다(大學之道는 在明明德하며 在新民하며 在止於至善이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큰 학문이란 먼저 자신의 덕을 밝히고 그로써 다른 사람들까지 스스로 그들의 덕을 밝힐 수 있도록 이끌어 낼 수 있어야 한다고 해석할 수 있지요. 그런데 사물잠에서는 ‘예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동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혼탁하고 복잡한 사회에서 그럴 수는 없습니다.

만약 정말 그렇다면 모든 것을 버리고 산으로 가서 혼자 살라는 말밖에 되지 않죠.유학은 음양의 이치를 따르며 자신을 닦고 타인까지도 이롭게 하는 학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공자의 말도 주자의 주석도 예가 아니면 아무 것도 하지 말라 했으니 이는 크나큰 모순이 아닌가요? 이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융통성이란 전혀 없는 꼬장꼬장한 선비가 존재했었고, 나라가 망해 가는데도 자신만의 세계에서 독야청청(獨也靑靑)한 학자도 있었던 것입니다.

과연 사물잠은 이런 한계를 가진 글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다시 해석해봅시다.

예가 아닌 것을 ‘보아도’ (나는) ‘보이지’ 않으며, 예가 아닌 것을 들어도 (나는) 들리지 않고, (남이) 예가 아닌 것을 말해도 (나는) 예가  아닌 것을 말하지 않으며, (남이) 예가 아닌 것에 동하더라도 (나는) 예가 아닌 것에 동하지 않는다.

이는 주자의 주(註)에서 ‘勿은 금지하는 말이다(勿은 禁止之辭也라)’라는 부분을 달리 해석한 것입니다.

생략된 ‘나’와 ‘남’을 넣으니 의미가 완전히 달라지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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