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섭 '대리사회'··· 저자가 '행위-말-생각' 3가지 통제로 본 노동현장의 단면을 그린 작품

우리는 주체적 삶을 살고 있을까.

김민섭의 <대리사회>(와즈베리)는 저자가 체험한 행위, 말, 생각의 3가지 통제를 바탕으로 대한민국 노동 현장의 단면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대리사회에서 한 인간은 더 이상 신체와 언어의 주인이 아니고, 사유까지도 타인의 욕망을 대리한다.

저자는 더 이상 온전한 ‘나’로서 존재하지 않았다.

이 사회 여러 공간에서의 경험에 따라 ‘순응하는 몸’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이 본디 저자뿐일까. 우리 모두의 모습일 수도 있다.

주체자로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경쟁에 떠밀려왔다.

우리 사회에서 양성되고 있는 대리사회의 괴물은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서 행동하고, 사유하지도 못한다.

욕망을 대리 수행하는 말 그대로 대리인간이다.

저자는 지난해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라는 책을 통해 주목을 받았었다.

저자는 대학에서 보낸 8년의 시간을 ‘유령의 시간’으로 규정지었다.

스스로를 대학의 구성원이자 주체로서 믿었지만 그 환상은 강요된 것이었고, 그는 타인의 욕망을 대리하면서 강의실과 연구실에만 존재했다.

강의하고 연구하고 행정 노동을 하는 동안 그는 사회적 안전망을 보장 받을 수 없었고 재직증명서 발급 대상조차 아니었다.

이후 대학에서 나온 그는 그 시간이 ‘대리의 시간’이었음을 알았다.

그리고 ‘대리운전’이라는 노동을 통해서 대학뿐만 아니라 이 사회가 하나의 거대한 ‘타인의 운전석’임을 다시 확인했다.

육아, 교육, 직업, 소비에 이르기까지 사실 우리는 모두 ‘타인의 운전석에 앉아 있는 대리기사나 마찬가지다.

자신이 그 차의 주인인 것처럼 도로를 질주하지만 조수석에는 이미 누군가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

내비게이션을 통해 끊임없이 전달되고 개인의 의지는 샅샅이 통제되고 검열된다.

차를 멈추고 운전석에서 잠시 내려, 한 발 물러서서 바라보면 균열의 지점을 찾을 수 있지만 우리는 액셀을 더 강하게 밟는 데만 힘을 쏟는다.

저자는 대학뿐 아니라 그가 속했던 여러 공간에서 주체로 서지 못했다.

어느 누구도 호칭 뒤에 숨은 그가 누구인지 알려주지 않았고, 그 자신도 스스로 한 발 물러서서 실체를 마주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대학에서 ‘중간자’이자 ‘경계인’이었다.

대학원생 조교로 학과사무실과 연구소에 있으면서, 시간강사로 강단에 서면서, 계속해서 경계를 넘나들었다.

경계에 서면 중심부나 주변부에서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균열’이다.

조직의 시스템이 가진 어느 균열이 희미하게나마 눈에 들어온다.

조금 더 중심부에 다가서서 그것을 곧 바로잡겠다고 마음먹지만 경계에서 멀어질수록 그 균열은 점차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마침내 경계를 완전히 벗어나고 나면 그 시스템이 완벽하다고 착각하게 된다.

이러한 내용들을 읽다보면 삶에 대한 회의감도 밀려온다.

내가 살아온 삶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주체적 삶인지 말이다.

저자는 스스로 ‘대리인간’으로 살아왔음을 고백하고 자신의 욕망을 대리시켜 온 괴물에게 주체로서 맞서 싸워나가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결국 한 걸음 뒤로 물러서야 한다.

밀려나기는 쉽지만 스스로 물러서기는 어렵다.

그것은 공간의 주체만이 할 수 있는 행위이며 절대로 패배가 아니다.

여전히 행동과 언어는 통제될지라도, 정의로움을 판단하고 타인을 주체로서 일으키는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강요되는 천박한 욕망을 거부할 용기를 얻는다.

그러고 나면 시스템의 균열이 보다 선명하게 보인다.

그 균열의 확장을 통해, 그동안 자신의 욕망을 대리시켜 온 대리사회의 괴물과 마주할 수 있다.

대리인간으로 밀려날 것인지, 스스로 물러서고 다시 나아오는 주체가 될 것인지, 우리는 선택해야만 한다.

/윤가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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