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부속품에 컨트롤 식민화 사생활 공유라는 프레임 가려져 무작위 쏟아내 현실 도구화 전락 언행 책임에 유료 대가 치르면 정설 순기능-퀄리티 높아질 것 단문 위주 휘발성 강한 메세지

고2 진입을 앞둔 학생을 둔 학부모는 필자의 또 다른 직업이다.

금지옥엽과 같은 자녀의 소망을 거스르고 제압하는 건, 납덩이를 진 것처럼 발걸음이 무겁다.

부모 누구라도 공감할 것이다.

거기다 일관성을 유지해가며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가치를 공감하는 수준에 이르렀다면 획기적이라 할 만 하다.

필자와 자녀에겐 SNS 사용여부가 공감의 대상이다.

우리는 SNS를 하지 않는다.

앞으로도 하지 않을 것 같다.

오바마 전 미국대통령이 애용했고, 해킹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하여 메르겔 독일 총리가 절대적으로 신뢰한다는 캐나다산 단말기를 필자는 8년이 넘도록 써오고 있다.

얼리 어댑터에겐 무시되고 버려지는 가치들에게 열광하고 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불편함을 초래하지 않은 이 3G 단말기는 든든한 참모처럼 필자를 보좌해오고 있다.

새로움보단 익숙함, 현란함보단 단순함, 기동력보단 견고함을 지향해 오던 필자에게 꼭 맞는 소통수단이다.

이젠 해가 더해질수록 제2의 자식처럼 각별한 사이가 되었다.

스마트폰 없이 스마트하게 생활하긴 쉽지 않음은 인정한다.

하지만 현명한 것에 대한 고찰은 어렵지 않다.

다양한 정보를 빨리 접할 수 있고 쉽게 공유할 수 있다고 해서 그 정보들이 다 내 것이 되는 건 아니다.

나와 대상자는 그저 플랫폼 역할만 할 뿐. 내가 원하는 정보를 여러 루트를 통해 얻으면 이미 나는 주체이고 그 과정 또한 결과만큼이나 값지다.

소통 역시 얼굴을 마주보고 교감을 하는 걸 가장 선호하지만, 복잡한 커뮤니티 속에서 많은 제약이 따른다면 서로의 육성을 통해 진정성을 확인하는 게 오히려 내겐 실용적이었다.

거품과 같은 오해와 불신이 많이 제거되기 때문이다.

그것 역시 여의치 않는다면 유료의 문자 메시지를 고집해오고 있다.

왜 유료인지 따져보면 사용자들은 쉽게 납득이 갈 것이다.

통화번호와 동일하게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이 문자 메시지인 것이다.

스팸처럼 흩날리지 않도록 송수신 체계가 확실하다.

어디까지나 사용자가 주체여야 하지 않는가. 내가 컨트롤 할 수 있는 지점까지가 주체적인 것이다.

즉, 명령자여야 할 사용자가 부속품에게 컨트롤된다면 이미 식민화 된 것이다.

스마트폰, 그리고 핵심 동기가 되는 SNS. 한번쯤 합리적 의심을 해봐야 하지 않을까? 한 고리타분한 사람의 쓸 데 없는 만용일까? 유명인들이 자녀의 소셜미디어 글로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하는 것을 왕왕 보면서도, 유명해질 일이 없는 일반인들에게는 꼭 무풍지대라 할 순 없을 것이다.

유명인들은 도구와 무기로도 얼마든지 활용도 해왔다.

그에 비하면 보통 사람들이, 또 그 자녀들이 시시콜콜한 사생활들을 ‘공유’라는 거창한 프레임으로 위험을 외면한 채 무작위적으로 쏟아내고 있는 현실이 얼마나 도구화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오히려 소모적으로 휘발되고 마는 유해환경에 적합한 희생양이 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를 일이다 쏟아낸 이야기, 감정, 사상들이 과거라는 이유로 희석되고 유화되고 세탁되지 않는다는데 가장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무차별적으로 자행돼 왔던 낙인처럼 영원한 주홍글씨가 된다는 생각에 난 아찔할 뿐이다.

상당히 열린 마인드의 소유자라고 자부했던 나부터 미래의 내 자식 동반자가 뿌려 놓은 궤적에 참작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섣부른 재단을 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은 없다.

그래서 아이가 사회의 질서를 인지하는 시기부터 무분별한 소통의 제약을 강조해 왔다.

이미 아이가 초등학생 시절에 스마트폰이 상용화 되어서 각별한 주의와 교육이 필요했던 시기였음은 두말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서두에 피력한대로 아이들의 소망 혹은 욕구를 부모로써 제어하기란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노력의 대가는 결코 작지 않고 특히 대세와 현상에 흔들리지 않은 견고한 철학으로 아이가 불필요한 수단들에 연연하지 않는다면 참으로 다행이라 생각한다.

친구들로부터 벌써 SNS의 폐해들을 어렵지 않게 접하고, 편리를 위해 불편함을 감수하는 아이러니를 늘 목도하면서도 호기심이 생길 때도 있단다.

그러면 기성 SNS 사용자인 친구들은 하나같이 실한 조언을 건넨다고 했다.

“애초부터 하지 않았다면, 시작할 생각은 하지도 말라.”

경험에서 건진 깨달음은 진리가 아니던가. 뭐든지 일방적인 건 존재하지 않는다지만, 득보다 실이 8할은 넘을 거라며 몸으로 ‘빅데이터’를 보여주는 삶을 살아가는 어느 지인도 거들기는 마찬가지다.

자신의 언행에 책임을 지게 하는 방편으로, 유료라는 대가를 치르게 하면 한층 신중해지고 날림없는 정설로 채워지는 순기능도 기대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때론 제 값을 치르는 게 퀄리티를 높이는 묘안이기도 하다.

적어도 난 그렇게 바라보고 싶다.

단문 위주의 휘발성 강한 메시지나 소통이 제 힘을 발휘할 때가 물론 있을 것이고 한정된 여건 안에서 강한 전파력은 매우 효과적이다.

하지만 긴 호흡으로 인생을 설계하고 결코 삶의 무게가 가볍지 않다고 봤을 때 편의와 실리만을 갖다 대서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정보와 지식이란 전술이 지혜가 요구되는 인생의 장기전에 버틸 수 없듯이 말이다.

사실이 진실을 대체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SNS가 수세기에 걸쳐 공고하게 이뤄온 성역과 질서를 무너뜨리며 인류에게 이바지한 것이 많고 앞으로 더욱 진보할 것이다.

인공지능의 출몰에서 기대만큼이나 두려움을 갖는 것처럼 사용자가 명령자로서의 위치를 재고하고 도구로써의 인식을 더욱 명확히 한다면 스마트폰은 산업혁명을 이룬 기계의 부상을 넘어서는 발전을 이룰 것이고, SNS라는 운영체계는 자본주의의 혈관인 금융처럼 서비스 약자에게 더욱 힘이 되는 도구처럼 작동되길 바래본다.

가진 자에게만 제공되는 대혈관과 같은 기회가 아닌 실핏줄 금융이 서민들에게 실익이 되는 것처럼. SNS의 역습은 없다.

/조정란 동네서점 조지오웰의 혜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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