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라운지 김은주 언론인 

"겨레의 문화창조의 활동은, 그 말로써 들어가며, 그 말로써 하여 가며, 그 말로써 남기나니, 이제, 조선말은, 줄잡아도 반만년 동안 역사의 흐름에서, 조선사람의 창조적 활동의 말미암던 길이요, 연장이요, 또, 그 성과의 축적의 끼침이라.  그러므로, 조선말의 말본을 닦아서, 그 이치를 밝히여, 그 법칙을 들어내며, 그 온전한 체계를 세우는 것은, 다만 앞사람의 끼친 업적을 받아 이음이 될 뿐 아니라, 나아가아, 계계승승할 뒷사람의 영원한 창조활동의 바른길을 닦음이 되어, 찬란한 문화건설의 터전을 마련함이 되는 것이다." 

지금부터 80년 전 1937년 3월1일 출간된 국어학자이며 국어운동가 외솔 최현배의 '우리말본' 머리말 첫 부분이다.

당시 신문의 책 소개 기사에는 '우리말본, 최현배 지음, 정가 십원, 임시특가 칠원, 발행소 경성 신촌 연희전문학교 출판부'로 되어 있다.

(동아일보 1937년 6월8일)  국판 709쪽으로 이루어진 '우리말본'은 최현배가 10년에 걸쳐 우리말 어법 및 문법을 정리한 책으로, 소리갈(음성학), 씨갈(품사론), 월갈(문장론)의 세 부분으로 구성됐다.

소리갈 편에서는 음성기관의 구조와 작용을 보여주고, 씨갈 편에서는 국어의 씨(품사)를 10씨로 나누어 뜻과 기능, 변화 등을 설명했다.

또한, 월갈 편에서는 월(문장)의 갈래, 구두점 사용법 등을 서술했다.

'우리말본'은 주시경 이래 그때까지의 국어 연구를 집대성한 것으로, 일제 강점기 국어학에서 가장 두드러진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우리 문법의 체계를 정연하게 잡았고 풍부한 용례를 갖추어 국어 문법 연구에 기여했다.

이 책은 1945년 해방 직후 가장 많이 읽힌 책으로 꼽힌다.

일제 강점기 마음 놓고 우리 글을 읽고 쓰지 못해 한이 맺혔던 것일까. 해방의 감격 속에 빼앗겼던 우리 말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교육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인지 각종 한글 관련 서적들이 베스트셀러가 됐는데 그중에서도 '우리말본'이 가장 많이 팔렸다.

23일은 최현배가 1970년 세상을 떠난 날이다.

그는 평생을 국어 연구, 국어 운동에 바쳤다.

1894년 10월13일 울산에서 태어난 최현배는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0년부터 3년간 주시경의 조선어강습원에서 한글과 문법을 배웠다.

"국어는 우리 민족정신의 형성 기반이며 우리의 생각과 행동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라는 주시경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았다.

관비 유학생으로 1919년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20년 동래 고등보통학교 교사가 되었다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1922년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 연구과, 이어서 교토제국대학 문학부 철학과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1925년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1년간 수업했다.

동래 고등보통학교 교사 시절 '우리말본' 초고를 만들었다.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국어부터 보존돼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정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1926년부터 연희전문학교 교수를 지내다가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강제 사직당했다.

흥업구락부 사건은 일제가 항일민족주의 단체 관계자들을 검거하기 위해 조작한 사건이다.

이후 1941년 연희전문에 복직되어 도서관에서 근무했다.

최현배는 1931년 조선어학회 창립에 참여, 중추적인 활동을 했다.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회 준비위원으로 활동했고 1933년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에 참여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체포돼 해방 때까지 4년간 복역했다.

조선어학회 사건은 일제가 조선어학회 활동을 독립운동으로 규정하여 회원 33명을 내란죄로 몰아 검거한 사건이다.

최현배는 8월17일 함흥교도소에서 풀려났다.

해방 후 가장 시급한 것은 국어 교재 편찬과 교사 양성이었다.

최현배는 1945년 9월부터 만 3년 동안 미군정청 편수국장으로 활동하며 교과서 행정을 담당했다.

그 기간 최현배는 '한글 첫걸음'을 비롯한 교과서 50종 이상을 펴냈다.

1949년 한글학회 이사장에 취임, 20년간 한글학회를 이끌었다.

1951년 문교부 편수국장을 역임했다.

1954년 연세대학교 교수로 취임하여 1961년 퇴임할 때까지 문과대학 학장, 부총장을 역임했다.

1954년 학술원 회원, 1958년 학술원 부원장을 지냈고 연세대 퇴임 후 1964년부터 2년간 동아대 교수로 재직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그는 이론가이며 실천가로, 국어학 연구, 국어 정책 수립, 국어 교육, 국어 운동 등에 전념하여 20여편의 저서와 100여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일본어 잔재를 몰아내는 우리말 도로찾기 운동도 전개했다.

한자 대신 한글쓰기, 세로쓰기 대신 가로쓰기를 주장했다.

주요 저서로는 '우리말본' 외에도 '한글갈,' '글자의 혁명,' '나라 사랑의 길,' '한글의 투쟁' 등이 있다.

그에게 국어 사랑은 곧 나라 사랑을 의미했다.

그는 1955년 제1회 학술원 공로상을 받고 과거 조선어학회 사건 당시의 수난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1942년 10월1일 새벽에 일제의 경찰에게 잡히여 두 팔목에 쇠사슬을 차고 함경도 홍원까지 가서 일 년을 두고 갖은 천대와 모욕과 악형을 받으면서 지나던 일, 그리고 일 년 뒤에 함흥감옥으로 자리를 옮겨서 또 이 년이란 세월을 보내던 일 모든 것이 나의 숨질 때까지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그 중에도 우리가 경애하여 마지않는 동지 이윤재, 한증 두 분을 옥중에서 잃은 일은 생각할수록 통분하기 그지없다.

우리말, 우리글을 연구, 정리, 보급, 보존에 힘쓴다 해서 우리 동지들도 모두 한가지로 철장에서 달초와 병고를 겪었다…우리말, 우리글을 사랑한다 해서 우리말 사전을 꾸민다 해서 피를 흘리고 목숨까지 잃은 형벌을 당했더니 이제는 그것이 공이라 해서 명예스런 상을 타게 되었다.

이것은 웬 까닭일까? 오로지 우리에게 「나라」가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스스로가 상 탔다는 것보다도 우리도 이러한 상을 태울 만한 체제를 가질 수 있게 되었음을 기뻐하여 마지아니한다.

이 세상 현실에서는 「나라」가 가장 귀한 것임을 다시금 깊이 느끼게 된다…"(경향신문 1955년 7월28일)   그가 세상을 떠난 지 50년이 다 돼간다.

그동안 후학들의 노력으로 한글연구가 꾸준한 성과를 거두었고, 별세한 그해 1970년 그의 사상을 기리는 외솔회가 설립돼 그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한류의 영향으로 한글을 배우는 외국인들도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외래어 오남용이 심각하고 인터넷, 모바일 기기의 보급과 맞물려 일상적인 언어생활의 왜곡이 도를 넘은 것이 현실이다.

지나친 비속어나 무절제한 신조어, 은어가 남발되고 우리말 변형이 심각하다.

당장 개인 간, 세대 간, 계층 간 소통이 어려울 정도다.

민족의 수난기에 살면서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한글을 지켜낸 최현배가 애통해 할 일이다.

올바른 언어생활을 통해 우리말을 보존하는 것, 그것이 나라 사랑을 위한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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