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8년 순창군 복흥면 하리 출생 메이지대 법학과 졸업 변호사 길 3.1운동-광주학생 사건 등 맡아 1948~1957년까지 초대 대법원장 정부 친일파 공판 방해 병석 누워 이승만 사임 종용 6.25발발 재임

▲ 한국전쟁때 부산에서 환도후 이승만 대통령과 김병로 대법원장(오른쪽 1953년)
▲ 1953년 환도 후 이승만대통령과 육군 1군사(사령관 백선엽) 방문한 김병로 대법원장
▲ 초대대법원장 가인 김병로 선생

해마다 8월이면 광복(1945)의 달이요, 정부수립(1948)의 달이다.

지금으로부터 69년 전인 1948년, 우리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만방에 선포했다.

당시 3권분립의 민주국가정부가 수립될 때 사법부의 수장인 대법원장에는 우리 전북출신의 가인(街人) 김병로(金炳魯)선생이 국회에서 일준을 얻어 취임했다.

그러면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 그는 과연 누구인가.  


이 나라 사법부의 수장으로서 사법부의 기초를 닦고 독재정권과 맞서 끝내 사법부의 존엄성과 독립을 지켜냄으로서 ‘한국사법의 화신’이라고 일컫는 가인 김병로 선생은 1888년 1월 26일 순창군 복흥면 하리에서 사간원 간관이었던 아버지 김상희(金相羲)공과 어머니 장흥고씨 사이의 3남매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이 울산 김씨인 그의 호는 가인(街人)으로 일찍이 계화도의 전간재(田艮齊) 문하에서 한학을 배웠다.

그러다가 신학문에 뜻을 돌려, 전남 담양군 창평의 선각자 고정주(高鼎柱)가 설립한 창흥의숙(昌興義塾)에서 일본어와 영어를 배웠다.

이 창흥학숙의 학우 중에는 설립자 고정주의 사위인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선생이 있었다.

이어 1911년 일본에 건너가 동경에서 일본대학 전문부를 거쳐 메이지(明治)대학 법학부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1913년 가인은 메이지대학 법학과를 졸업했는데 성적은 270명 중 22번으로 평균 73점이란 비교적 좋은 성적이었다.

당시 25세였던 가인은 귀국하여 한 때 경성법학전수학교, 보성전문학교 등에서 강사 생활을 했다.

그 후, 32세에 그가 소망했던 변호사가 되었다.

그가 변호사로서 맡았던 유명한 사건은 3.1운동 사건을 비롯, ▲의정부 사건 ▲광복단 사건 ▲ 6.10만세 사건 ▲광주학생 사건 ▲구국단 사건 ▲원산노조 사건 ▲형평사 사건 ▲흥사단 사건 ▲안창호 사건 ▲암태도 소작인 사건 ▲백두산 화전민사건 등 무려 1백여 건에 달하는 사건을 맡아 눈물겨운 변론을 했다.

또 독립투사에게는 변론료는 고사하고 사식도 수없이 넣어 주었다.

이인(李仁) 등 변호사와 독립투사 구출에 온갖 힘을 다 했음은 물론, 그의 변론은 실로 나라를 잃은 슬픈 민족의 피를 끓게 하는 눈물겨운 것이었다.

그는 비단 독립투사를 위한 변론만이 아니었다.

이밖에도 민족정기 앙양과 인권옹호를 위해서는 언제나 선봉에 서는 한편 특히 북풍회 사건을 비롯 월남 이상재(月南 李商在) 민세 안재홍(民世 安在鴻) 등과 신간회(新幹會)를 조직하여 직접적인 민족항쟁운동에도 참여했다.

광복 후에는 미 군정에서 잠시 사법부장 자리에 있으면서 그 혼란했던 시기의 치안확보를 비롯, 사회질서 확립에 노력했다.

이어 1948년 대한민국이 정식으로 건국하게 될 때, 이해 8월 5일 제헌국회에서 인준을 받게 된다.

당시 국회에서는 재석 157명중 117표(반대31, 무효6, 기권3)를 얻어 압도적으로 인준을 받았다.

당시 가인은 법조계 지도자의 한사람에 거치지 않고 각계로부터 거의 독보적인 존재로 추앙을 받고 있었다. 그는 국회에서 대법원장 취임사를 통해, “현명하신 국회의원 여러분! 여러 의원들께서는 헌법에 따라 3권 분리 원칙을 뚜렷이 내세웠습니다.

그 원칙에 따라 만반의 법령을 제정하실 때 거기에 기준해서 제정하셔서 사법기관으로 하여금 유감없는 소신과 그 능력을 발휘하게 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라고 인사말과 아울러 소신을 피력했다.

그는 이로부터 만9년 3개월만인 1957년 12월 15일까지, 이 나라 초대 대법원장으로서 파란만장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대법원장! 그 자리는 법과 양심의 상징이며, 국민 기본권의 최후 수호자인 ‘사법부의 수장(首長)’이다. 다음은 수다했던‘인간 김병로,’‘법관 김병로’에 대한 여러 가지 일화(逸話)를 모아 본 것이다.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초대 대법원장이 된 가인은 ‘한국의 간디’로 불리었다.

9년 동안 대법원장을 지내면서 타협을 모르는 곧은 성품으로 시시비비를 가려 사법부의 권위를 지킨 ‘큰 법관’이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법원하면 김병로, 김병로 하면 법원”을 연상할 정도로 가인은 이 나라 사법부의 대명사였다.

깡마르고 딱딱한 체구를 지닌 가인은 항상 한복 두루마기에 까만 중학생 운동화를 신고 대한민국 초창기의 법원을 짊어 진 ‘법의 화신(化身)’이었다.

- 행정부에 의한 첫 수난은 1948년 정부수립 직후에 있었던 반민족 행위자, 즉 ‘친일파’들에 대한 공판이 있을 때였다.

정부측에서 경찰까지 동원해, 반민특위의 일을 고의로 방해했던 것이다.

이 때 가인은 상심한 끝에 병석에 누웠었다. 일제 때 신간회(新幹會)사건으로 앓기 시작한 병이 도저서 한쪽 다리를 잘랐다.

다리 수술을 할 때 이 대통령은 대법원장의 병고가 오래 간다는 이유로 사임할 것을 종용했다. 당시 이 대통령은 비서관과 권승령(權承烈) 법무장관을 시켜 직접 대법원으로 가서 사임을 종용토록 했다.

그러나 그들은 가인 앞에서 감히 말조차 꺼내지 못하고 어물쩍 하다가 6.25를 만났다. 6.25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가인은 대법원장에서 물러났을지도 모른다.

- 부산 피난시절, 부산지법에서 서모대위 사건으로 서민호(徐珉濠) 의원에게 정당방위를 적용, 무죄를 선고했다.

이 대통령은 가인을 비롯, 내무, 국방, 법무장관 등이 모인 자리에서 “현역군인을 죽였는데 무죄를 선고하다니 말이 되는가”고 따졌다. 그러자 대법원장 가인(街人)은 “판사가 내린 판결은 대법원장인 나도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무죄선고가 못마땅하면 정당한 절차를 밟아 상고할 수 있다”고 하면서 사법관의 독립을 주장했던 것이다.

이렇듯 행정부와 사법부 간에는 어두운 기류가 흘렀지만 이 대통령과 대법원장 가인은 항상 상대방을 예의로 대했다. 이 대통령과 가인은 거의 동시대에 민족운동을 한 처지이지만 가인은 국가원수인 대통령에 대한 예우는 극진했다.

대통령에게 보내는 문서는 항상 친필로 썼으며, 말미에는 꼭“…복망(伏望) 하나이다.”로 맺었다. 또 이 대통령도 가인을 부를 때는 반드시 ‘대법원장님’으로 호칭하여 사법부 수장에 대한 예우를 잊지 않았다.

- 가인 김병로 선생은 1948년 초대 대법원장이 된 후, 문서 결재에 이름 석자가 새겨진 수정(水晶)도장을 썼다. 얼마 안돼 도장이 부러졌다. 대법원장을 대신해 반토막 도장을 찍느라고 애를 먹던 아래 직원들이 참다못해 “도장 하나 다시 파시지요”라고 어렵게 말을 했다.

그러자 가인은 이에 “자네는 그것 하나 제대로 찍을 기술도 없는가”하면서 웃어 넘겼다. 그런데 가인은 그 도장을 퇴임할 때까지 9년여동안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또한 가인은 “예산의 5할이 낭비되고 있다. 자기 재산이라면 그렇게 함부로 쓰지 말라”고 자주 말했다.

- ‘김병로 대법원’(金炳魯 大法院)이 얼마나 살림을 짜게 했던지 1949년 국회는 이같은 국정보고서를 낸 일이 있다. “법원은 양심과 정직이 지나쳐 예산 획득이 대단히 졸렬하다. 판결서류는 영구보존해야 하는데도 용지난 탓에 법관이 개인 편지지에 판결문(判決文)을 기록한 사실까지 발견했다. 앞으로 법원은 예산투쟁을 좀 더 적극적으로 해 주기 바란다.”고 했다.

부산 피난시절 가인은 점심을 자주 굶거나 밀가루 죽으로 때웠다. 청렴이 결벽에 가까웠다.

“온 천하가 일자리는커녕 먹을 것, 입을 것이 없고, 발 뻗고 잘 방 한칸 없는 사람들도 수두룩 하다. 얼마가 됐던 국록을 받는 사람은 불평하거나 돈을 탐내서는 안된다”고 자주 부하 직원들에게 말했다. 그리고, 대법원장 공관 화장실엔 손바닥 보다도 작게 자른 신문지 묶음이 화장지 대신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공관의 난로는 기름을 사용하는 오일 난로인데도 연탄난로로 사용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 한번은 가인 친구의 아들이 겨울에 한강에서 잡아 선물한 잉어 다섯 마리도 돌려 보냈다. “법관은 털끝만큼도 의심받을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는 이유에 서였다.

가인은 1953년 후배 법관에 이런 가르침을 남겼었다. “법관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의심을 받아서는 안된다. 만약 의심을 받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법관으로서는 최대·최고의 명예 손상이 될 것이다라고-.

- 김병로 대법원자의 호 ‘가인(街人)은 언제부터 사용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일설에 의하면 일본 동경유학 때 망국의 비분 속에서 자신이 직접 지었다는 말도 있고, 그 뒤 민족운동을 할 때 친구들이 불렀다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다.

어떻던 전자의 경우는 나라를 잃었으니 이제 길거리의 떠돌이가 되고 말았다는 뉴앙스가 담긴 것이요, 후자는 변호사로서 독립운동가를 위해서 전국 곳곳을 쏘다니는 바쁜 몸이 됐다는 뜻에서 ‘가인’(街人)이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대법원장 때 몇몇 친구들이 이제 나라가 독립이 되었으니 ‘가인’이란 호도 바꿔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에 “나라를 찾고 독립은 됐지만 남북통일이 될 때가지는 고칠 수가 없지”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 가인은 평소 정치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오상(五常)을 중시하는 도의정치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면, 정치인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절제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 말년에 가인은 독서에 취미를 붙였다. 주로 율곡전서(栗谷全書)를 비롯, 반계수록(磻溪隨錄), 논어(論語), 맹자(孟子) 등을 즐겨 읽었지만 서예는 가까이 하지 않았다.

그리고 계구신독(戒懼愼獨) 군자불기(君子不器) 유항산유항심(有恒産有恒心) 즉, “만사를 두렵게 생각하고, 몸을 근신해야 하며, 군자는 작은 일에 구애하지 않으며, 궁핍하지 않아야 마음을 올바로 할 수 있다.”는 등을 좋아했다.

- 사람들은 흔히 가인이 정치를 했드라면 실패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가인은 남의참모가 되기에는 고집이 너무 강했으며 지도자가 되기에는 너무나 융통성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 그런 의미에서 볼 때 가인은 오히려 법의 수호자, 사법부의 수장이 되기에 타고난 자격자였다는 것이다.

- 가인은 일본에서 법학공부를 마치고 귀국해서는 한 때 경성법전(京城法專, 서울대 법대)의 전신인 경성법학전수학교와 보성전문(현 고려대학)에 출강했다.

당시 보성전문학교의 학생이었던 이병의(李丙義)는 가인의 강의를 다음과 같이 회고한 일이 있다.

수십명의 교수, 강사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선생은 민법, 물권법을 담당하신 가인 김병로 선생이었다.

교단에 서시면 예리한 금속성으로 청산유수와 같이 1분 1초도 쉴사이 없이 열성 담긴 강의였으니, 제목만 정하면 원고 없이도 몇 시간이든 계속할 수 있는 풍부한 자원에는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경청했으며, 일본의 저명한 박사의 학설까지 비교 비판 하시니 실로 흥미진진 했다.라고-.

- 1923년 가인은 허헌(許憲) 이승우(李升雨) 김용무(金用茂) 이인(李仁)등과 ‘형사변호공동연구회’를 만들어 “한 사람에 대한 보수로 5명이 공동연구하여 변호한다”는 취지로 법조인의 공동전선을 형성했다. 이 단체의 명칭은 단순히 연구회였지만 사실은 법정을 통해 조선인의 독립운동이 무죄임을 주장하는 한편, 구금된 독립운동가들에 사식(私食)을 넣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가족까지도 돌보곤 했다. 그래서 사회에서는 독립운동가의 후원단체라고까지 말할 정도였다.

당시 ‘3인 변호사’란 말이 있었다. 그것은 ‘세 사람’이 아니고 ‘세인(3仁)’이란 뜻으로, 가인 김병로(街人 金炳魯), 긍인 허헌(兢仁 許憲), 이인(李仁) 등을 가리킨 말이었다. 이 ‘3인(仁) 변호사’는 한결같이 애국지사 변호에 합심 노력했던 것이다.(긍인 허헌은 8.15후 월북한 사람이다.)

- 50년대초 전북지사를 지내 이요한(李要漢·옥구출신)씨가 제헌의원 때 대법원장실로 가인을찾았던 일이 있다. “대법원장님! 저를 도와주셔야 할 일이 하나 있어서 찾아 왔습니다.

- “무슨 일이 있었기에 국회의원이 나를 찾아왔소.” “실은 저의 선거구민이 이런저런 일로 법에 걸려 구속되어 있는데요. 그러자 가인은 즉석에서,

- “여보 이 의원, 딱도 하지, 법을 만든 국회의원이 법을 어기는 일을 하려 들다니 말이 되오.?” 라고 하여 이 의원은 ‘죄송합니다’하고는 나왔다고 그가 생전에 한 말이다.

- 또, 훗날 가인 밑에서 대법관을 지내게 되는 김갑수(金甲洙)시가 대검 검찰국장 때 어느 설날 대법원장 공관으로 몇몇 동료들과 세배를 갔다. 이 때 그는 낮술 한잔 마신 것으로 약간 취했었다.

ㆍ 가인 : “오셨는가. 바쁘실텐데 세배는 무슨….그런데 춘부장께서 강녕하시고-.”

ㆍ 김갑수 : “뭐야~ 내 기를 죽이려고 그런 말은 하지 말아요.”

취중이긴 햇지만 지나쳐도 너무 햇다. 이러자 함께 갔던 동료들이 부랴부랴 끌고 나왔다. 이튿날 지난날의 실태(失態) 이야기를 듣고 김갑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부랴부랴 대법원장실을 찾았다.

ㆍ 김갑수 : “어제는 감히 돌이킬 수 없는 큰 죄를 저질렀습니다.” 하고는 대법원장실 바닥에 무릎을 꿇엇다.

ㆍ 가인 : “그게 무슨 말이야. 누가 무엇을 어땠는데 그래. 이 사람아 어서 일어나게. 이게 무슨 꼴인가.” 하면서 가인은 어제의 일을 전혀 모르는 척 했다는 이야기, 실은 김갑수씨의 아버지와 가인과는 오래전부터 가깝게 지내던 친구사이였다.

- 가인 김병로 대법원장 밑에서 대법원을 지킨 대법관은 다음의 16명이었다. 김찬영(金瓚泳), 노진설(盧鎭卨), 김익진(金翼鎭), 양대경(梁大卿), 최병주(崔丙柱 부안출신 납북) 백한성(白漢成) 한상범(韓相範), 김두일(金斗一), 이우식(李愚軾), 김동현(金東鉉), 한격만(韓格晩), 김갑수(金甲洙), 김세완(金世玩), 고재호(高在鎬), 배정현(裵廷鉉),허진(許瑨) 씨 등이었다.

※ 이우식 대법관은 경북 출신이나 일제 때 전주법원 판사로 재직하다가 광복후, 초대 전주지방법원장을 지냈으며 또 전주에서 변호사 개업을 하면서 오늘의 전북대 설립운동에 크게 활동한 법조인이었다. 또 전주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한 바도 있었다.

- 훗날 가인 밑에서 대법관을 지낸 김갑수(金甲洙)씨는 ‘대법원장 김병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바 있다.

“가인은 강직한 분이었을 뿐만 아니라 공인으로서의 자세를 철저하게 지킨 분이었으며, 또 평소 재판기록을 보는 것이 취미가 되다시피 했다.

또 어떻게나 박식한지 대법원장이라기 보다는 선생님과 같은 역할을 했다. 사건 청탁을 비상으로 안 분이고, 당시 고집이 어떻게나 센지 대법원 합의부에서 합의할 때 보면 법론을 가지고 논쟁을 하다가 결론이 나기 어려우면 두 번 세 번 연기할지언정 바로 승복하는 일이 없어 대법관들도 밤 세워 자기 이론을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합의해서 결론이 나면 가인은 몰랐던 좋은 것을 코치해 주었다.” 고 격려할 만큼 폭이 넓었다.


- 대법원장으로서 가인의 일화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만9년 3개월간에 걸친 대법원장직을 마치고 1957년 12월 15일 만 70세로 정년 퇴임을 했다. 가인이 대법원장 재임 때 가장 강조한 것은 “법관들의 청렴과 강직”이었다. 그는 퇴임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동안 내가 가장 가슴 아프게 생각한 것은 전국 법원 직원들에게 지나치게 무리한 요구를 한 것이다. 인권옹호를 위해 사건 처리의 신속을 강조했던 것이 그렇고, 또 살아갈 수 없을 정도의 보수를 가지고도 그대로 살아 가라고한 결과가 된 것이 그렇다. 나는 모든 사법종사들에게 굶어 죽는 것을 영광이라고 하였다. 그것이 부정을 범하는 것보다는 명예롭기 때문이다.“ 가인이 남긴 말은 이밖에도 많다.

그중에서도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폭군적인 집권자가 법에 의거한 행동인 것처럼 형식을 취해 입법을 강요하거나 국민의 의사에 따른 것처럼 조작하는 수법은 민주 법치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이를 억제할 수 있는 것은 사법부의 독립뿐이다.” 라는 말이 유명하다.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은 그가 쓴 가인의 묘비명에서 “만인 가운데서 하나를 만나기도 어려운데 그같이 쉽게 만나기 어려운 사람으로 모든 겨레의 흠앙 속에 살다 가신 분이 계셨으니 가인 김병로 선생이 그 이시다…”라고 했다.

그리고 대법원에서는 지난 2009년 가인의 고향인 순창군 복흥면 하리에 ‘가인 김병로 기념관’을 짓고 거기에 ‘법관 연수시설’도 병설했다. 이는 법관들에 도덕성과 강직성을 키우는데 이곳 보다 더 좋은 곳이 없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한편 필자는 1999년 6월, 신임 전주지법 강철구(姜喆求) 법원장과 인사 나누는 자리에서 “전북은 한국사법의 성지”인데 그 유명한 김병로, 최대교, 김홍섭 선생의 비석하나 볼 수 없다“는 말을 듣고 지방 사람으로서 크게 부끄러움을 느꼈다.

당시 필자는 언론계의 현장에서 일하던 때였다. 바로‘한국법조3성(聖)’기념사업회를 조직하고 상임공동대표의 입장에서 김영삼 정권의 고건(高建) 국무총리의 지원을 얻어 전주 덕진공원에 이 ‘한국법조의 세어른’의동상을 세운 바 있다.

거기에 ‘한국법조의 세어른’이란 책자도 곁들여 발간했다. 가인 김병로 선생-. 이같은 의연한 법 정신의 화신이 우리 대한민국 사법부의 초석이 되었던 것은 한국사법사(韓國司法史)에 있어서 얼마나 다행스러웠고 또 큰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SHAPE * MERGEFORMAT 가인 김병로 선생의 묘비문은 명문장가로 유명했던 노산 이은상(鷺山 李殷相)이 짓고, 글씨는 당대의 명필로 유명했던 일중 김충현(一中 金忠顯)이 썼다.

<편집자 붙임> 街人 金炳魯선생 墓碑文(가인 김병로선생 묘비명) 무릇, 시대의 탁류 앞에서는 세 종류의 사람이 나타나는 것이니, 하나는 거기에 굴종하는 사람이요, 또 하나는 거기에 굴종하는 사람이요, 또 하나는 피하며 숨어서 사는 사람이요, 다른 하나는 그 탁류와 더불어 마주 싸우며 끝까지 지조를 굽히지 않는 사람으로서 이는 만인 가운데서 하나를 만나기도 어려운 것인데, 그 같이 쉽게 만나기 어려운 사람으로 모든 겨레의 흠앙 속에서 살다가 애도 속에 가신이 한분 계셨으니 가인 김병로 선생이 그 이시다.

구 한국 말엽 국정이 차츰 어지러져 가던 1886년 음력 12월 5일에 전북 순창에서 사간원 간관 상희 공의 맏아들로 탄생하시어 15세에 간재 전 우선생에게서 한문을 배웠고, 국치 이후 24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명치, 중앙 등 여러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면서 고하 송진우, 인촌 김성수, 해공 신익희 등 동지들과 더불어 학우회를 조직하고 기관지 ‘학지광’을 발행하여 항일독립사상을 고취하다가 30세에 귀국해서는 법학 전문과 보성 전문학교 등에서 교편을 들었으나 민족의 울분을 참지 못하여 마침내 사회 투쟁을 결심했었다.

33세에 변호사를 개업한 뒤에 조선인 변호사 회장과 조선 변호사 협회장 역임하면서 법정 투쟁을 하기 자못 25년간 3.1운동 사건을 비롯하여 저 유명한 단천 사건, 간도 사건, 6.10만세 사건, 106인 사건, 흥사단 사건, 안창호 사건, 백두산 화전민 학살 사건 등 매년 100여 건에 달하는 눈물겨운 변론으로 피를 끓이며, 이인 등 동지 변호사들과 함께 독립투사 구출에 있는 힘을 다하고, 또 민족정기 앙양과 인권옹호를 위해서는 언제나 선봉이 되는 한편, 특히 북풍회의 창설을 비롯하여 월남 이상재,민세 안재홍들과 함께 신간회를 조직하여 직접적인 민족 항쟁운동에까지 나섰던 것이다.

드디어 59세에 해방을 만나서는 독립정부 수립을 목표로 하고, 결성된 최초의 정당이었던 한국민주당의 대표 총무의원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과도정부 사법부장을 지냈으며, 정부수립 후에는 초대 대법원장 겸 법전편찬 위원장으로서 법질서 확립에 큰 공로를 세워 69세에 고려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76세에는 정부로부터 문화 훈장 대한민국장과 건국공로훈장 등을 받았다.

만년에는 갈수록 혼탁한 조국 사회에 참된 민주정치를 세워보기 위하여 국민의당을 창당하는 등 재야정당 통합에 심혈을 기울이다가 과로로 인해 1964년 1월 13일 서울 인현동 자택에서 영면하시니 향년 78세요, 정중한 사회장으로 수유리에 안장 되었다.

그는 일찍 조국 광복으로써 최대의 염원을 삼았고, 광복된 뒤에는 또다시 국토 통일과 민주사회 건설로써 유일한 소원을 삼았으므로, 일생을 통해 개인과 가정보다는 나라와 겨레를 생각함이 앞섰으며, 그 강직한 성격과 청렴한 생활로 일세의 스승이 되었던 것이다.

높은 뜻과 맑은 정신은 겨레의거울이 되었고, 이에 비록 몸은 가셔도 조국을 위한 기원은 살아있어 길이 나라의 힘이 될 것이다. 1964년 1월 일 이은상 짓고 김충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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