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 전북문학관 관장  

요즈음 뉴스만 보면 분통이 터진다.

우리나라는 도대체 왜 이럴까? 가슴이 답답해서 보기가 싫다.

웃어른들은 말씀하신다.

요즘 청년들은 우리나라에 대한 자부심이 없다고.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는 이 나라를 어찌 애정 어린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라는 문구가 자주 부끄러워진다.

더 이상 같은 민족이라는 이유로 옹호만 할 수 없는 세상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다른 나라의 국민성과 자세한 비교도 하지 않고 너나없이 한국인은 냄비근성이 있다고 말하는데, 이 말의 근원은 일제의 잔재 식민사관에 의해 만들어진 말이다.

상고 시대 부터 우월했던 자랑스러운 한국인에게 식민사관의 패배의식을 심어주고 세뇌 목적으로 만들어 쉽게 통치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별 생각 없이 한국인에게 냄비근성이 있다는 말은 스스로를 자학하는 것이다.

그 잔재의 뿌리가 너무 깊기에 우리는 지금도 우리 스스로의 정의로운 행동을 냄비근성으로 비하하게 된다.

유독 정의롭고 의로운 행동에만 ‘냄비 근성’이라는 말이 달린 기사와 댓글이 많다.

운명론적 사고와 불교적 허무의식을 태어날 때부터 문화적으로 어느 정도는 지니고 태어난 우리 민족에게 오랜 시간 동안 아주 잘 먹히는 ‘세뇌 구호’였던 셈이다.

철학자들은 자신이 쓴 책에 담긴 문장처럼 살다가 죽고, 가수들은 자신의 노랫말처럼 살다가 죽는다.

‘난 뭘 해도 안 돼’, ‘난 뭐든지 잘 돼’라고 습관처럼 내뱉는 푸념과 잡담이 자신의 미래를 만드는 ‘언어적 내면화’의 힘이다.

이런 언어의 힘을 권력은 잘 이용할 줄 안다.

500만의 추모 인파를 보고, 언론과 정부기관들과 패배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냄비근성’이라는 일제 강점기 부터 이어진 세뇌구호를 꾸준히 연관 짓고 있다.

한국인의 폭발력과 잠재력, 역동성은 냄비와 뚝배기로 감당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권력은 대중이 스스로를 폄훼할 수밖에 없는 개념과 구호를 만들어야 했다.

필자는 감히 권력유지를 위한 악의적 목적과 "피지배자들의 패배적 내면화" 의도를 가진 "냄비 근성" 이라는 나쁜 개념을 우리가 가진 본질을 나타내는 개념으로 바꾸고자 한다.

우리에게는 ‘가마솥 근성’과 ‘뚝배기 근성’, ‘구들장 근성’이 있다.

장작의 화력으로도 데우기 어렵지만 한 번 데워지면 그 온기가 은근하게 남아 식지 않는 채 유지되는 뒤끝을 의미하고 뚝배기 근성은 ‘한번 가진 소신과 신념’은 외부온도와 관계없이 잘 바꾸지 않는 뚝심을 의미하며 구들장 근성은 아궁이 가까운 곳은 열기가 과하여 장판 바닥을 검게 태울 정도로 뜨겁고, 그 뜨거운 열기에 감화되면 주변의 돌들도 덩달아 데워져 방안의 온도를 한 겨울에도 40도 이상으로 유지시키며 ‘창호지로 막은 출입문’으로도 겨울을 버티게 해주는 강하고 덥고 오래가는 열정을 의미한다.

권력이 보기에는 아궁이 가까운 곳만 열이 과하여 장판이 탈 정도인 것만을 보고 금방 식어버리는 냄비근성으로 폄훼하여 부르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검게 그을린 그 장판의 주변 부위와 가장 구석진 구들장의 주변도 손바닥을 못 댈 정도로 뜨겁다는 것은 권력이 아닌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상식이다.

그리고 그 뜨거운 열기가 오래도록 유지된다는 사실 또한 모두가 알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냄비 쓴지는 얼마 안됐다.

예부터 전통적으로 쓰던 용기는 뚝배기와 가마솥이었다.

뚝배기와 가마솥은 은근히 열기가 오래가는 아주 좋은 보온성을 가진 용기다.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런 용기에 음식을 담아서 먹는 것을 무지 좋아했다.

냄비근성이다.

엽전 근성이다 하는 것은 우리를 비하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이미 아궁이에 가까운 구들장의 장판은 검게 탔다.

주변의 구들장으로도 온기가 전파되어, 구석진 후미까지 손바닥을 못 댈 만큼 뜨거운 상태다.

이런 상태를 ‘냄비근성’으로 폄훼하고 싶어 하며 건드리는 자의 의도대로 반응하면서 살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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