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류화단의 꽃 '우향 박내현'
한국 여류화단의 꽃 '우향 박내현'
  • 전북중앙
  • 승인 2018.02.05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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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백의 인물전 #7 2월의 인물 / 우향 박내현

1920년 평남 진남포 출생
5세때 군산 구암동으로 이사
1943년 장, 조선전람회 특상
1956년 노점, 여성 첫 대통령상
반추상적 동양화 새로운 실험
1946년 운보 김기창 화백 결혼
아호 '우향' 운보 여운따라 지어
국전 심사위 백향회 창립 활동
1976년 1월2일 건강악화로 숨져

우향(雨鄕) 박내현(朴崍賢)  

그는 전북 군산출신으로 1956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국전)에서 작품 ‘노점’(露店)으로 대통령상을 받은 동양화의 여류미술가이다.

내가 우향을 알게된 것은 1957년으로 기억된다.

당시 나는 서울의 모 일간지 편집부 기자로 일하던 때였다.

당시 그 신문사에는 시사평론가 정충량(鄭忠良)여사가 논설위원으로 있었다.

그로 인해 그의 방에는 매일같이 천경자(千鏡子·화가) 조경희(趙敬姬·수필가) 손소희(孫素姬·소설가) 박내현(朴崍賢·화가) 여사 등 저명한 여류들의 출입이 잦았다.

그 때 나는 우향을 알게 됐다.

마침 올해는 우향이 1976년 1월 2일 향년 56세로 세상을 떠난지 42주년을 맞는다.

이에 우향의 인간상과 미술세계를 더듬어 본다.

 우향(雨鄕) 박내현(朴崍賢)은 우리 한국 화단(畵壇)의 한 시기를 빛내고 간 여류화가이다.

우향은 1920년 평남 진남포(鎭南浦)에서 출생했다.

그러나 5세 때부터서는이 고장 군산으로 이사, 군산시 구암동에서 자랐다.

  군산초등과 전북고녀(현 전주여고)를 1936년에 졸업하고 경성(서울)여자사범학교 연습과(演習科)를 거쳐 순창초등에서 잠시 교편을 잡은 일도 있다.

  지금도 군산에는 그의 친척들이 살고 있으며 6.

25동란 때는 군산에서 그의 가족들이 피난생활을 했다.

이러고 보면 우향은 비록 태어난 곳은 평안도이지만 실은 우리 전북출신의 자랑스런 여류화가이다.

순창에서 교편생활을 접은 우향은 일본에 유학,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했다.

그러던 중, 광복 2년전인 1943년 3학년 때 일본인 하숙집 딸의 화장하는 모습을 화필에 담은 ‘장’(粧)을 당시 조선미술전람회(鮮展)에 출품, 특상을 받는 뛰어난 재질을 보였다.

  그 후, 우향은 ‘한국 미술사’에 여러 가지 진기록을 남겼다.

우선 1956년 한 해에 국전(國展·5회)에서 ‘노점’(露店)을 출품, 여성으로서는 처음 대통령상을 받았으며, 대한미술협회전에서는 ‘이른 아침’으로 특상 등 두 개나 받았다.

  지금 서울 덕수궁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작품 ‘노점’에 나타나 있는 굳건한 여성들은 당시 6.

25전쟁 때 피난지에서도 가족들을 위해 노상에 좌판을 벌인 아줌마들의 모습들이다.

한손으로는 아이를 보듬고, 다른 한손으로는 생선 광주리를 머리에 인 어머니의 모습들이다.

어쩌면 이 나라 여성, 어머니들이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활동하는 강인한 모습들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작품을 시작할 때 섬세한 채색, 즉 먹으로 먼저 그린 다음 색채를 올리고 면(面), 분할(分割)에 의한 화면 구성으로 반추상적인 동양화의 새로운 실험을 전개 했다.

  또 60년도에 접어들면서는 순수 추상의 세계에 나감으로 명쾌한 정신성을 추구해 나갔다.

채색의 장식적 톤을 종합적으로 현대 서양의 입체파가 도달한 조형을 방법론에 상응케 하는 것이었다.

  그 후, 70년대에 들어서서는 판화연구를 위해 미국 뉴욕에 유학까지 한 맹렬 여류 화가였다.

어떻던 우향은 전통적인 동양화 재료를 구사하면서 서구적인 공간 설정을 화면 속에 끌어들여 감각적인 책채와 대담하고 강렬한 화풍을 이룩하는 등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했다.

  이렇듯 전통적인 동양화에서 현대적인 작품을 개척한 우향의 미술세계는 한국여성미술의 차원을 벗어나 오직 세계속의 한국미술을 크게 떨친 것이라고 화단에서는 평하고 있다.

  우향은 1946년 26세 때 운보(雲甫) 김기창(金基昶) 화백과 3년간의 교제 끝에 마침내 결혼을 했다.

당시 두 사람의 결혼에는 곡절이 많았다.

동경 유학까지 한 부잣집 맏딸이 하필이면 말을 하지도 못하는 가난한 화가와 결혼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기 때문이다.

  1943년 23세 때, 신록이 눈부신 5월의 어느 날, 우향은 ‘선전’(鮮展)의 시상식에 왔다가 7년 위의 청년화가 운보 김기창 화백을 처음 만났다.

당시 운보는 동양화의 대가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화백의 제자로서 이미 화명을 날리던 청년이긴 했다.

그런 연유로 두 남녀 화가는 3년 세월에 걸쳐 사랑의 밀어를 주고 받은 끝에 비로소 가연을 맺은 것이다.

  이 부부는 이름 속에서도 사랑의 징표를 새겼다.

즉 박내현(朴崍賢)의 ‘내’(來)자에 ‘산’(山)을 붙여 ‘내현’(崍賢)이라고 했다.

이것은 부군 운보가 붙여준 것이다.

거기에 박내현은 아호도 새로 갖게 됐다.

김기창의 아호인 ‘운보’(雲甫)의 여운을 따라 ‘우향’(雨鄕)이라고 했다.

이것도 물론 부군 운보가 지어 준 것이다.

이것을 새겨 보면 운보는 ‘구름의 무리’이며, 우향은 ‘비가 오는 고장’이라하여 이보다 더한 천생연분은 없다고 한다.

  운보와의 사이에 1남 3녀를 둔 우향은 말이 불편한 부군 운보에게 평생을 두고 구화법(口話法)까지 가르쳐 준 어질고 착한 아내였다.

운보가 생전에 필담(筆談) 없이도 대화가 가능했던 것은 모두가 아내 우향의 숨은 부덕에 의한 것이다.

우향은 1974년에는 신사임당상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우향을 가정과 예술을 함께 완성시킨 여류 화가라고들 추앙을 했다.

  1984년 2월, 우향이 이 세상을 떠난지 10주기를 맞아, 서울에서는 ‘우향 박내현전’이 열린 일이 있었다.

이 때 운보는 죽은 아내 우향을 생각하면서 “불러도 대답없는 그대여! 나는 다시 한번 더 소리쳐 불러 보오.

나의 영원한 아내 박내현”하고 울먹이며 노래한 일이 있었다.

  우향은 생전에 국전의 초대작가와 심사위원을 역임 했었고, 중진 동양화가들의 모임인 백양회(白陽會)의 창립 멤버로 활약하기도 했다.

또 1967년에는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한국대표로 참가한 일도 있었다.

그 때 남미 각국과 멕시코 등지를 시찰한 뒤, 미국의 뉴욕에서 6년간 판화와 타피스트리(Tapestry)를 공부하고 귀국했다.

1975년 다시 판화수업을 위해 미국에 갔다가 건강이 나빠져 그해 귀국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건강은 끝내 회복되지 못하고 1976년 1월 2일, 서울 성북동의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향년 56세였다.

우향의 평생 대표작으로는 ‘부엉이’(1953), ‘노점’(露店·1956), ‘작품F(1973) 등이 유명하다.

미술 평론가 이경성(李慶成)씨는 우향의 미술세계에 대해, 평하기를 “우향의 그림에서는 우선 생명을 불태우는 듯한 성실성과 신선함의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고 격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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