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간만에 장장이 시(詩)다운 시가 담겨진 귀한 시집을 하나 손에 할 수가 있었다. 이것이 한하운시집이었다. 처음 날은 다 읽지 않을 수 없었고 그다음에는 하루에 한편 이상 맛보지 않기로 하며 서서히 음미해 보았다… 이 시인은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나는 문둥이가 아닌 성한 사람이올시다"고 절통하게 부르짖었는데 그는 분명 성한 누구보다도 성한 시인이다. '보리피리,' '국토편역,' '결혼유한,' '인골적' 등은 다섯 번 여섯 번 읽어도 또 읽고 싶은 시들이다. 시를 공부하는 이들 애호하는 이들 또 인생을 알려는 이들에게 서슴지 않고 나는 시집 '보리피리'를 권한다." 

시인 노천명이 동아일보 1955년 6월 14일 자에 기고한 한하운 제2 시집 '보리피리'의 서평이다.

한센병 시인으로 잘 알려진 한하운은 병마로 인한 처절한 체험을 소재로 한 작품들로 많은 사람에게 울림을 주었다.

한하운은 1919년 3월 20일 함경남도 함주에서 지식인 지주의 아들로 출생했다. 함흥제일공립보통학교를 거쳐 이리농림학교에서 수의 축산학을 공부했다. 1936년 봄, 몸 곳곳에 콩알만 한 결절이 생기고 궤양이 퍼지더니 결국 한센병 확진 판정을 받았다. 한하운의 나이 17세, 이리농림학교 5학년 때의 일이었다.

 

한하운은 경기도 수원시 세유동의 한센병 환자 정착촌 하천부락에서 지내다가 1950년 3월 인천시 부평의 한센병 환자 마을 성혜원으로 이주해 투병하는 한편 1952년 5월 부평에 신명보육원을, 1953년에는 경기도 용인에 동진원을 설립했다. 또한, 같은 해 대한한센연맹위원회장을 맡아 한센병 환자 구제사업에 힘썼으며 1958년에는 청운보육원을 설립했다. 

1953년 8월 한 주간지가 '한하운 시초'에 실린 작품 '데모'의 일부 표현을 문제 삼아 한하운을 좌익으로 몰아세웠고 심지어 한하운이 가공의 인물이라고까지 주장했다. 이 사건은 확대되어 경찰과 검찰, 국회에서까지 문제가 됐다. 한하운은 직접 서울신문을 찾아가 즉석에서 '보리피리'를 써 보이며 자신이 실재 인물임을 증명했다. 이어 문제가 된 시의 표현도 불온하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어 사건은 마무리되고 서울신문 10월 15일 자에 그의 대표작 '보리피리'가 실렸다.


1959년 '한하운 자작시 해설집'을 내놓은 지 얼마 안 돼 그의 한센병이 음성으로 판명됐다. 그는 사회에 복귀, 1960년 8월 서울 명동에 출판사 무하문화사를 설립했다. 해설집 '황토길'을 펴내고 활발히 작품을 발표했으며 1962년에는 미 공보원에 의해 그의 반생을 그린 극영화 '황토길'이 제작되기도 했다. 1966년에는 한국사회복귀협회장을 맡았다. 

그러나 간 경화증에 시달리다가 1975년 1월 28일 인천시 부평구 십정동 자택에서 사망했다.

그의 작품은 한센병이라는 절망적인 상황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감상이나 원망으로 흐르지 않고 마치 남의 일을 말하는 듯한 객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서정적이고 민요적인 가락으로, 생명과 건강한 삶을 염원하고 있다. 


한하운은 널리 알려진 시인이다. 그러나 작품성에도 불구하고 문단에서 합당한 조명을 받지 못했다. 사람들이 기피하는 한센인으로서 소외된 주변부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그가 살았던 인천시 부평구에서는 지난해 9월 학술심포지엄이 열려 그의 생애와 작품을 돌아봤다. 부평역사박물관은 지난해 12월 십정동 백운공원에서 한하운 시비 제막식을 했다. 시비에는 '보리피리'가 새겨져 있고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어"로 시작하는 또 다른 대표작 '파랑새'를 상징하는 새 한 마리가 조각돼 있다.

한하운은 "시는 눈물로 쓴다"라고 말했다. 그의 시가 지금도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도 끝까지 생의 의지를 내려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은주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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