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와 겨레를 위한 진정한 민족 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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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중앙
  • 승인 2018.03.12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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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백의 인물전 #8 3월의 인물 / 인촌 김성수

1881년 고부군 인촌리서 출생
아호 '인촌' 출생마을 이름 따
1908년 동경 유학 민족주의 공부
보성전문학교 인수 현 고려대
경성방직 세워 독립자금 모아
1951년 부통령 선출 이승만 정권
독재 속 민주주의 지켜내
부통령 때 이승만 대통령과 담소하는 인촌선생.

우리는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선생을 말할 때 흔히 “그 어른은 흉이 없는 분”이라고 하고, 또한 인촌의 일생을 “어질고 원만한 인격과 겸허와 신념으로 사달간 민족의 선각자”라고도 했다.

  그러나 인촌의 일생은 저항과 투쟁으로 점철된 파란만장의 그것이었다.

인촌이 재세했던 1891년부터 1955년까지는 그야말로 나라 안팎 사정이 격동과 수난의 시대였다.

  인촌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태어나 일제시대에는 침략주의와 싸웠고, 8.15광복후에는 공산주의와 싸웠으며, 건국 후에는 독재정권과 끊임없이 싸운 신념의 일생을 살다간 민족의 지도자였다.

  인촌이 본격적으로 사회활동을 시작했던 1910년대는 일본에게 국권을 송두리째 빼앗겨 질식할 듯한 압박 밑에서 신음하던 때였다.

  일본 도오쿄오(東京)에서 와세다(早稻田)대학 유학을 마치고 1914년 돌아온 인촌의 가슴 속에 형성된 포부는 신문화에 의한 민력배양(民力培養)을 바탕으로 한 민족독립이었다.

이것은 일제 36년을 통하여 일관된 그의 신념이었다.

  일제의 총독정치 밑에서 인촌이 민력을 키우기 위해 기울인 노력은  ①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  ② 산업진흥을 통한 민족자본 축적  ③ 언론을 통한 민족의식의 앙양 등 세가지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인촌은 단순한 교육가나 기업가나 언론인은 아니였다.

그는 오직 민족주의자였다.

  민족주의는 그의 신념이었고 철학이었으며, 평생의 생활지표이기도 했다.

스스로도 ‘온건한 민족주의자’라고 자처했지만 경성방직(京城紡織)에서 생산된 최초의 제품(광목)에 태극성(太極星)이란 상표를 붙였고, 보성전문(현 고려대)의 본관을 신축할 때 후문 기둥에 ‘태극’ 모양을 새겨넣은 것은 그의 민족주의 사상의 뿌리 깊음을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였다.

  여러 기관과 기업의 장이면서도 소위 총독부 치하에서 끝내 창씨개명을 거부했으며, 일제가 주는 작위(爵位)도 외면하고 받지 않았다.

또한 인촌은 건국 후 정치를 하면서도 대언장어(大言壯語)나 권모술수는 일체 배격했다.

  또한 평생에 많은 사업도 일으켰지만 그 때마다 유능한 인재를 찾아 윗자리에 앉히고 자신은 뒤로 물러 앉았다.

그러다가 일이 벌어지면 스스로 나아가 책임지고 수습하고는 또 뒤로 물러났다.

사람을 쓰되 끝까지 믿었으며, 한번 쓴 사람은 어떤 일이 있어도 버리지 않았다.
 

부통령 시절의 인촌 김성수선생(1951년)

 1.인촌의 출생과 가계    

인촌은 1881년(고종 18) 10월 21일(음력 9.9) 전라도 고부(古阜)군 부안(富安)면 인촌(仁村)리(현 고창군 부안면 봉암리 인촌마을)에서 지산(芝山) 김경중(金暻中) 선생의 4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호 ‘인촌’(仁村)은 출생한 마을 이름을 그대로 딴 것이다.

이에는 그가 동아일보사 창립주를 모집하려 전국을 순회할 때 대구유지 서병오라는 분에게서 도움 말을 듣고 지었다는 일화가 있다.

  그의 본관은 울산으로 조선조 때 그의 문중에서 문과에 오른 사람은 무려 14명이나 된다.

그 중 가장 출중한 선대는 12대조가 되는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이다.

그는 숭문원 영정자에 이어 박사, 설서, 열수찬 등의 벼슬을 거쳐 옥과(전남 곡성의 玉果) 현감을 지냈다.

  천문, 지리, 의약, 산수, 율법 등에 두루 통달했던 하서(河西)는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동문이었다.

현종 때 이조판서 양관대제학을 추증 받았으며 시호를 문정(文靖)이라고 했다.

또 문묘의 18현 중에 배향되어 있다.

  생부  지산 경중 공은 1886년 경릉참봉 비서 봉상시 부제조를 거쳐 진산(珍山)군수를 지냈는데 저서에도 힘써 1907년에 ‘조선사’ 17권을 출간했으며 후일 그의 유고집 ‘지산유고’(芝山遺稿)를 남겼다.

 
 2.인촌의 일본 유학시절    

인촌은 일찍이 서당에서 한학(漢學)을 배우다가 1906년 봄, 16세에 빙부(고정주·高鼎柱)가 세운 전남 담양군 창평의 ‘창평의숙’(昌平義塾)에서 영어, 산수, 일어 등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인촌은 평생의 지기가 되는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를 만났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오래 머물지 않고 부안 변산에 있는 내소사의 청련암에 들어가 공부를 했는데 이 곳에서 다시 근촌(芹村) 백관수(白寬洙)를 사귀게 되었다.

이들 인촌, 고하, 근촌 등 세 사람은 글을 읽고 담론을 나누며 망국의 전야에 와 있는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면서 앞으로 큰 뜻을 키워 나가기를 다짐했다.

  이 무렵 마침, 인촌은 부친 지산공이 현감으로 재직하고 있는 진산현 이웃 금산군의 군수 홍범식(洪範植)의 아들 홍명희(洪命熹)를 만나게 된다.

당시 일본 동경의 대성(大成) 중학에 유학중이던 홍명희는 검정 학생모 학생복에 가죽 구두를 신고 있었다.

인촌은 이 대 처음으로 이러한 개화된 양복차림의 학생을 만난 것이다.

  이 때 인촌, 고하, 근촌 등 세 청년은 홍명희를 만나면서 1908년 10월, 청운의 꿈을 안고 일본 동경에 유학할 것을 결심했다.

이들은 먼저 군산(群山)의 금호(錦湖)학교에서 국어, 일본어, 역사, 지리, 화학 등 기초적인 신학문을 다소 익히고 일본 동경에 유학하게 되었다.

  인촌은 처음에는 금성(錦城) 중학을 거쳐 와세다(早稻田)대학 정경(政經)학과에 들어가 면학에 정진했다.

이 때 인촌은 비로소 학문과 민족주의, 민주주의 사상이 모두 이 때 여기에서 싹튼 것이다.

당시 3년간의 대학생활은 그의 생애에 있어 가장 보람있는 시절이기도 했다.

  당시 동경유학에서 사귄 친구들은 와세다 출신의 선산 장덕수(雲山 張德秀), 기당 현상윤(幾堂 玄相允), 각천 최두선(覺泉 崔斗善), 양원모(梁源模), 동경대 출신의 낭산 김준연(朗山 金俊淵), 김우영(金雨英), 박용희(朴容喜), 유억겸(兪億兼), 명치대학의 가인 김병로(街人 金炳魯) 고당 조만식(古堂 曺晩植) 소앙 조용은(素昻 趙鏞殷), 정노식(鄭魯湜) 그리고 처음 일본 유학을 도와 준 벽초 홍명희(碧初 洪命熹) 등 이었다.

  대학시절 결석 한번없이 열심히 공부를 하면서도 인촌은 동생 연수(秊洙)를 동경에 불러, 보살피며 그를 일본 쿄오토(京都)의 제3공등학교에서 경도도제국대학 경제학과를 마치도록 뒷바라지를 다 해 줬다.

그가 만 6년 동안의 일본 유학을 마치고 1914년 7월에 귀국했을 때 그의 나이는 24세였다.

 
 3.민족교육의 중흥    

일본 동경유학에서 돌아온 후 인촌이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것을 1908년 사립 기호(幾湖)학교를 인수하면서였다.

  인수 당시 서울 홍수계골(花동 138)에서 겨우 80평으로 기와집을 교사로 쓰고 있던 초라한 이 학교를 중앙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현 중앙고(계동)로 옮겼다.

부지를 약 4,000평으로 늘리고, 건물도 새로 지었으며, 교사진도 보강하여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새 명문학교로 만들었다.

한편, 중앙학교의 숙직실 자리에는 ‘3.1독립운동 책원지’라고 새간 기념비가 서 있으니 이 곳에 훗날 민족의 대 함성으로 메아리쳤던 3.1운동만세의 진원라는 뜻이다.

그후 학교명을 중앙고등보통학교(약칭 중앙고보)로 바꾸는 등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인촌은 다시 민립대학(民立大學) 설립을 추진하고 나섰다.

그러나 일제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32년에 보성전문(普成專門)학교를 인수함으로서 결국 인촌의 꿈은 실현되었고, 이것이 곧 오늘날 사학의 명문인 고려대학교(高麗大學校)이다.

  인촌이 보성전문을 인수하면서 구상한 교육이념은 무엇보다도 ‘민족지도자의 양성’이었다.

이같은 그의 뜻은 학문을 익힘으로써 최소한 자립할 수 있는 사람을 길러내고 또 그들로 하여금 몽매한 국민들을 바르게 이끌어 나가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보성전문은 1945년 조죽이 해방된 후에는 고려대학교로 개편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4. 민족산업의 육성    

1919년 10월 5일, 3.1운동의 열기가 채 가시기 전 인촌에 의해 창립된 경성방직(京城紡織)은 우리 민족의 손으로 세운 근대화된 기업이라는데도 큰 의미가 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자본을 모으기 위한 1인 1주의 주식(株式) 모집운동을 벌였다는데서 보람을 찾을 수 있는 사업이었다.

경성방직을 세우곻, 가동하기까지는 모든 것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야말로 숱한 시련과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인촌은 굳게 믿고 온갖 정성을 기울려 마침내 1923년 4월, 회사설립 3년만에 영등ㅍ호 공장에서 비로소 첫 제품의 광목이 생산되어 일반 시장에 선 보였다.

상표를 태극성표(太極星 票)라고 했는데 이는 우리나라의 상징인 태극기를 나타낸 것이다.

주가는 1주당 12월 50전으로 그 때 쌀 2가마값과 맞먹었다.

또 공모된 주는 총 1만6천2백10주나 되었으니 이에 대한 국민들의 참여도를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주주들이 어떤 이익을 바라서가 아니라 그야말로 독립자금을 낸다는 마음으로 참여했던 것이다.

이 경성방직은 우리 한국인 만든 주식회사의 제1호이었다.

   
 5. 민족언론의 창달    

중앙고보와 보성전문학교를 육성함으로써 민족교육의 웅지를 펴고, 경성방직을 설립하여 민족산업의 발판을 다진 인촌이 동아일보(東亞日報)를 창간한 것은 언론을 통해 억압받고 짓눌린 우리 민족의 자각을 일깨우고, 한편으로는 일제 침략자들을 규탄하는 언론을 창달하려는 의지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1920년 4월 1일 창간호를 발행한 동아일보는 이같은 인촌의 뜻을 잘 나타냈던 창간사의 한 대목을 보면,   … 조선 민중은 일대 악몽의 襲한바 되었도다.

그가 사람인지라 어찌 사상과 희망이 없으리오.

그러나 능히 敍하지 못하며 그가 또한 민족이란 어찌 고유한 문명의 특장과 생명의 미묘함이 없으리오.

그러나 감히 부르짖고자 하되 開口하지 못하며 달음질 하고자 하되 用身치 못하니…   라고 이렇듯 하여 동아일보는 그 발자취가 그대로 이 민족의 정항사(抵抗史)요, 수난사(受難史)가 되고 이 땅의 문화사(文化史)가 되었다.

동아일보는 일제하에서 4회에 걸쳐 무기정간 처분을 당했으며, 끝내는 자진 폐간의 형식으로 문을 닫았다가 광복의 해인 1945년 12월 1일 복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최근 2월에 지령(紙齡) 3만호를 기념 특집을 낸 바 있다.

   

 6. 인촌의 정치활동    

인촌이 정치 일선에 나선 것은 1946년 1월으로, 고하 송진우 선생의 뒤를 이은 한국민주당의 수석 총무에 취임하면서였다.

한국민주당은 민족이 해당되면서 민족진영의 대동단결을 표방하면서 이 땅에 진정한 민주주의의 뿌리를 내리게 하기 위해 발족한 대표적인 우익정당으로서 처음부터 좌익계열과의 대립은 치열했다.

해방 후의 정국은 심각한 좌우의 대립상을 보였었다.

우익진영은 미국의 망명생활에서 돌아온 이승만(李承晩) 박사와 김구(金九)선생을 영수로 하는 대한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좌익은 공산당이 중심이 되어 활동을 하였음으로 좌우대립은 심각했다.

따라서 정국은 혼미를 거듭했었다.

더욱이 1945년 12월말, 한국민주당의 당수격이었던 수석총무 고하 송진우(古下 宋鎭禹)선생이 테러리스트에 의해 암살을 당하자 정국은 더욱 술렁거렸다.

이같이 어려운 때에 인촌은 한국민주당의 당수가 되어 이승만 박사를 민족진영의 영수로 추대하여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크게 이바지 했던 것이다.

1948년 5월 10일, 우리 나라에서는 유사이래 처음으로 총선거가 실시되어 제헌(制憲)의원(임기 2년) 2백명을 뽑았다.

당시 한민당이 확보한 의석은 29석으로 단일 정당으로는 제1당이지만 아집과 독선이 강했던 이승만 박사와의 관계는 점사 소원 해졌다.

그리하여 인촌은 1949년 대한국민당과 합당하여 민주국민당을 창당하고 이승만 정권의 독재정치에 항거하는 민주세력을 규합, 민주화 투쟁에 앞장 섰다.

당시 6.25 전란으로 부산에 내려간 이승만 정권은 국회의원의 불법체포 등 노골적인 독재정치를 함으로 인촌은 그 때마다 민주세력의 선두에서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소생시키기 위해 투쟁했다.


7. 부통령 시절과 만년의 인촌    

1951년 1.4후퇴 후 임시 수도였던 부산 정계에서는 국민방위군사건과 거창(居昌) 양민학살 사건이 터져 큰 파문을 일으켰다.

정부는 사건자체를 감추려 했기 때문에 국민의 원성은 날로 높아 갔으며, 이를 규명하기 위한 여론은 물끓듯 했다.

이를 지켜 본 이시영(李始榮) 부통령은 그 유명한 “시위(尸位)에 앉아 소찬(素餐)을 먹을 수 없다”면서 정부의 처사를 성토한 후, 부통령 사퇴서를 내버리고 물러 앉아 버렸다.

이에 5월 13일 국회는 후임 부통령에 인촌을 선출했다.

당시 집권당인 자유당에서는 이갑성(李甲成)을 정식으로 내세웠으나 하기 싫다는 인촌에게 패했다.

명리에 담백한 인촌은 이때에도 부통령직을 극구 사양했지만 본인의 승낙도 없이 당의 동지들이 일방적으로 인촌을 후보로 등록했던 것이다.

부통령에 선출된 후에도 계속하여 취임을 고사한 인촌은 “아무에게도 민의를 거역할 권리는 없다”는 주변의 간곡한 진언에 못이겨 마침내 국회에 나가 취임식을 갖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인촌은 명목만 부통령일 뿐 실권이 없었고, 이 대통령의 독재는 날로 더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의 재선을 위한 직접선거의 개헌에 제동을 거는 민국당이 미웠고, 따라서 당수인 인촌에 대한 기피중도 노골적이었다.

대통령 직선제의 개헌안이 국회에서 압도적으로 부결되자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 했고, 소위 딱벌떼라 이름하는 정치 테러들이 난무하여 피난수도 부산은 공포의 도가니였다.

부통령에 취임한지 1년, 소외감 속에서 신병(身病)까지 얻은 인촌은 이같은 이승만 대통령의 1인 독재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마침내 1952년 5월 29일 부통령직을 사임하고 말았다.

당시 김부통령은 비서관 신도성(愼道晟)을 병석으로 불러 직접 구술한 장장 4천여자에 달하는 사임사는 구구절절 이 땅의 민주주의와 국가의 장래를 걱정하고 일인독재(一人獨裁)의 횡포를 신랄하게 규탄하는 고언(苦言)이 담긴 것이었다.

김 부통령은 사임사(辭任辭)에서,  “…원컨대 앞으로 국가민족을 염려하는 일개 평민의 입장에서 전제군주적 독재정치의 위협을 제거하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함으로써 항구적인 자유와 평화와 복락을 이 나라, 이 겨레에 가져오도록 하기 위해 국민대중과 결사 분투할 것을 맹서한다.”고 진정한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투쟁할 것을 천명했다.

인촌의 부통령 사퇴서가 ‘수리되자 이어 소위 발췌개헌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고, 8월 15일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박사가 재선됨으로써 이나라 민주주의는 1차적인 종언을 고했다고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렸다.

한 달만에 부통령 사임서가 국회에서 수리된 후에도 1년여 부산에 머물면서 신병을 치료하던 인촌은 2년 8개월만인 1953년 8월에 상경했다.

그동안 민주주의 수호의 선봉이었던 민국당 당세는 날로 기울어져 가고 있었고, 이를 지켜보는 인촌의 마음은 몹시 아팠다.

부산정치파동 이후 많은 당내 인사들이 탈당한데다가 원로들은 수감중이거나 와병중이었으며, 신당을 만든다는 이야기가 나돌고 있었다.

당이 더 이상 분렬하면 파국에 이를 것을 우려한 인촌은 당 중진들을 자택으로 불러 민주투쟁을 위해서는 소절(小節)을 굽히고 대의(大義)에 따라 단결해야 한다고 간곡히 설득하였다.

  나(私)보다 우리(公)를 앞세우는 인촌의 호소에 당 간부들은 머리를 숙였고, 그 해 11월 22일 열린 제4차 전당대회에서는 당헌을 개정하여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를 위원장으로 추대 했으며 인촌 자신은 고문으로 물러 앉았다.

분당(分黨)직전의 당을 살려내고 자신은 돌아 온 것이다.

 8. 인촌의 서거와 국민장  

인촌의 생을 거두어 간 것은 부통령 때부터 4년동안 시달려 온 뇌혈전이 아니라 갑자기 나타난 위 출혈이었다.

1955년 새해에 접어들면서 병세는 한결 차도가 있어 부축을 받지 않아도 정원을 거닐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2월 상순께 갑자기 위출혈을 일으켰다.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중증이었다.

이같이 건강상태가 극도로 악화된 인촌은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장면(張勉)의 권유에 의해 가톨릭 영세를 받았고, 영세명은 ‘바오로’-.

나라의 앞날이 걱정이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 민족의 큰 별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선생은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눈을 감았다.

1955년 2월 18일 하오 5시 55분 향년 65세의 아까운 나이로 한 시대의 장을 거둔 것이다.

2월 19일 정부는 인촌의 장례를 국민장으로 결정 발표했으며, 장지는 고려대 캠퍼스내의 동산으로 정했다.

2월 24일 인촌의 영구는 자택에서 서울운동장에 마련한 영결식장을 거쳐 1백여만명의 서울 시민이 연도에서 애도하는 가운데 장지로 향했다.

인촌은 평생을 이 나라와 겨레만을 위해 살다 간 우리 전북인이었고, 또한 이 나라, 이 민족의 큰 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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