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에 대한 기억 중 대학 시절 이야기이다.

1991년 여름 학과 동기들과 함께 서울 인사동으로 놀려간 적이 있다. 미술대학에서 한국화를 전공하고 있는 우리는 그 당시 만해도 인사동하면 무척이나 가보고 싶은 곳, 이 곳에서 전시회 열면 성공한 듯 설렘이 가득했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인사동의 전시장을 쉼 없이 돌아보고 화방에 들어가 미술재료를 구입하기도 했다.

특히, 다양한 한지를 구입할 수 있어서 제법 구입해서 돌아온 적이 있다.

이후 학과 수업시간에 담당 교수님께 동기들하고 인사동 갔다 온 걸 말씀드리던 중 우리가 구입해온 한지를 보시고 교수님께서 얼마에 구입했는지 물어보시고, ‘아이고, 애들아! 전주와 완주에서 생산되는 한지를 더 비싼 가격에 서울까지 가서 구입했냐?’ 라며 웃으셨다.

그 해였을 것이다. 학과 동기들과 완주군에 있는 송광사로 야외스케치를 가게 되었다. 송광사 입구에서도 한참을 올라가 작은 폭포가 있는 계곡에서 풍경을 스케치하고 내려오는 길에 올라 갈 때는 미처 못 보았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계곡을 옆에 긴 줄에 빨래를 널 듯 하얀색 종이가 즐비하게 널어져 있는 것이다. 당시에는 흥미롭다는 생각만 하고 주의 깊게 보지 않았다.

이후 전통문화관련 기관에서 근무를 하면서 그 시절 내가 접했던 한지에 관한 것들이 매우 소중한 경험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현재 ‘우리의 한지는 어떠한가?’ 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급변하는 현대사회에 전주에서는 한지의 명맥을 이어가고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한지산업지원센터 설립·운영 중이며, 관련 정책연구와 포럼 및 세미나, 한지문화축제 등 다양한 방식과 콘텐츠로 한지의 미래지향적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근래에는 해외 유명 박물관에서 우리의 한지를 활용하여 복원작업이 진행되기도 하였으며, 미술계에서는 한지를 활용한 수묵화, 문인화, 서예 외 한지공예 분야 활성화를 통해 한지가 지속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방안 마련을 위해 각계각층에서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한지의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 홍보와 보급 그리고 산업화하기 위한 노력에 비해 한지의 원형에 대한 고찰과 연구 노력은 과연 어느 정도였는지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이는 한지의 원료인 닥나무가 그 시발점이 될 것이다. 한지의 주원료인 닥나무의 생산은 일반 시장 경제와 연계하는 건 이직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다. 공공적 영역에서 순차적인 지원체계를 마련하여 선순환 구조를 구현해야 할 것이다.

옛 전라감영에는 한지를 제조하는 ‘지소’라는 곳이 있었다.

조선시대 한지 제조와 제도는 『1415년(태종 15)에는 국영 제지공장이며 종이제조 사무담당기구이기도 한 조지소(造紙所)가 설치되어 제지기술과 합리적 생산관리에 관한 일이 맡겨지고 지질(紙質)의 개량과 생산원가의 절하를 위한 노력이 경주되었다.

서울의 중앙 제지공장에는 2인의 제조(提調)가 기술적인 책임을 지고 배치되었고, 사지(司紙) 1인과 별제(別提) 4인의 기술관리 및 85인의 지장(紙匠)과 95인의 잡역부가 배치되어 있었다.

지방공장에는 모두 698인의 지장이 각 도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제지기술자들은 법적인 우대를 받도록 규정되어 생활보장을 받는 특전이 부여되었다. 출처:한국학중앙연구회』 고 한다.

우리는 닥나무의 원료에서 한지 제조 방식까지 깊이 있게 고증하여 그 원형을 발굴하고 재현해야 할 것이다.

자칫, 산업화라는 슬로건과 함께 전통문화의 근원이 되는 원형을 소홀이 한다면 향후 후손들에게 그 뿌리를 전할 수 없다는 위기감을 우리는 느껴야 한다.

향후 우리 전통문화의 원형들이 지속적으로 발굴 및 재현되어 지난 대학시절 느꼈던 한지에 대한 정서적 감동이 지속적으로 많은 이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지길 바란다.

/이영욱 한국전통문화전당 정책기획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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