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가 순우리말일까? 한자일까?

가을 밭 가득한 배추를 보고 있자니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배추는 한자어 백채(白寀)가 <배채→바차→배추> 로 그 음이 바뀌어 온 말이다.

그러나 표준 국어 대사전의 지침에 따라 '고유어'로 볼 수 있다는 ‘배추’.

명색이 방송인 출신인데 이 정도는 답을 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사명감에 인터넷 백과사전을 뒤져 짐짓 내 지식인 양 정리를 했다.

아마 이것도 일종의 직업병일 것이다.

‘백 가지 채소가 배추만 못하다’ 그래! 배추가 한자어이건 고유어이건 그건 또 무슨 대수일까.

배추는 그 맛과 영양으로 이미 가을 채소의 명불허전이다.

서리가 내릴 요맘때쯤에는 배춧속이 반쯤 찬다.

이때 볏짚 같은 것으로 포기 윗부분의 겉잎을 감싸 모아 묶어주고 속이 가득 찬 후엔 한 포기씩 신문지 옷을 입혀 상자에 넣어둔다.

김장 준비의 시작이다.

배추는 그냥 잎채소가 아니다.

비타민A와 비타민C의 알찬 덩어리다.

또 베타카로틴이라 불리는, 몸 안으로 들어와 비로소 비타민A로 변하는 성분이 있는데 가을배추엔 다른 계절의 배추보다 20% 이상 더 많다.

겨울에 특히 부족하기 쉬운 비타민C의 영양 역시 곱절이 더 크다.

‘음식 보양’ 내가 겨울 배추쌈을 즐겨 먹는 이유다.

평소에 고혈압이나 어지럼증에 시달리는 사람이라면 생 배추를 씹어 먹는 게 좋고, 변비로 고생하는 이들이라면 두말없이 배추를 권하고 싶다.

너 나 할 것 없이 하루하루가 다이어트라, 음식을 곁에 두고도 일부러 굶는 요즘.

배불렀던 기억을 손꼽을 수 없었던 가난했던 그때에도 배추는 있었다.

늦가을로 접어들며 계절 내내 배춧잎 전만을 부쳐주던 야속했던 엄마.

그 시절의 엄마들이 ‘베타카로틴’이니 ‘비타민’을 알아서 배추 전을 챙겼을 리는 없을 터, 사랑하는 자식들을 위한 영양제임을 삶의 지혜로 아셨을 것이다.

배추는 다섯 번을 죽어야 비로소 김치가 된다.

땅에서 뽑히면서 한 번, 날 선 칼에 갈라지면서 두 번, 소금에 절이며 세 번, 양념에 부대끼며 네 번, 이내 잘 익어 사람 입속으로 들어가며 마지막 다섯 번.

그렇게 죽음으로서 김치로 제 역할을 해낸다.

그러니 배추의 죽음은 안녕이 아니다.

작별이 아니다.

비극적 결말도 아니다.

 성숙의 과정이고 부활의 신호이다.

뻣뻣하기 그지없던 덩치만 큰 배추는 스스로 숨을 죽여 발효와 숙성의 긴 시간을 견뎌낸다.

소금에 순응하여 필요 없는 물기를 빼내고 낯선 양념들과 버무려져 화합하며 장독 속 고독과 어둠을 이겨내고 다시 태어난다.

김치! 그냥 먹을 일이 아니다.

배추 한 포기 허투루 볼 일이 아니다.

맛있는 그 한 포기가 되기 위해 가을 내내 치열했던 배추의 시간을 곱씹어 본다.

‘아작 아작’

/서향숙 방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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