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송환된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유골이 동학농민혁명 125년 만에 전주에 안치됐다는 소식이다.

김승수 전주시장과 이종민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은 지난 24일 시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다음 달 1일 전주 동학농민혁명 추모공간에 농민군 지도자의 유골을 영구 안장한다고 밝혔다.

유골은 일본군에게 처형된 이름 모를 동학 농민군 지도자의 머리뼈로, 1906년 일본인이 인종학 연구를 위해 고국으로 옮겼다.

이후의 행방은 묘연하다가, 1995년 일본 북해도대학 표본창구에서 다시 발견되면서 유골의 존재가 알려졌다.

당시 유골 상자에는 '메이지 39년(1906년) 진도에서 효수한 동학당 지도자의 해골, 시찰 중 수집'이라는 문구가 있었다.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등은 각고의 노력으로 한일 합의를 거쳐 이듬해 유골을 반환받았지만, 안장할 곳이 없어 23년간이나 전주역사박물관 수장고에 보관해왔다.

유골은 긴 기다림 끝에 올해 동학농민군 주요 전적지인 전주 완산칠봉에 혁명군의 기억 공간이 문을 열면서 잠들 곳을 찾았다.

시와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는 오는 31일 전주시 완산도서관 강당에서 ‘동학 농민군 전주 입성 125주년 기념식’을 마치고 이튿날 유골 안장식을 거행하기로 했다.

유골은 전주역사박물관에서 발인식 후, 풍남문 앞에서 노제와 진혼식을 마치고 녹두관에 안장될 예정이라고 한다.

사실 이번 유골 안치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2001~2014년 6차례 진도 송현리, 정읍 황토현, 김제 구미란 등에 안장을 추진했으나 주민이 반대하거나 예산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번번이 무산됐었다.

진도군의 반발도 있었다.

유골에 뭍은 흙이 진도 토양이라며 연고문제를 들어 반환소송을 벌이기도 했다.

유골의 신원을 특정하지 못할 경우, 보관·관리하는 자가 연고자가 될 수 있다는 법률에 따라 결국 기념사업회가 안치에 나설 수 있었다.

1996년 국내로 송환된 유골에는 ‘한국 동학당 우두머리’라는 한자가 새겨져 있기도 했다.

왜 어떤 연유로 동학농민군 지도자는 죽어서도 유골에 한자가 새겨지고, 타국에서 연구재료로 쓰여지는 수모를 겪어야 했을까? 동학농민혁명은 3·1 만세운동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그리고 촛불혁명으로 이어지며 대한민국의 숭고한 민주주의 정신의 출발이 된 사건이다.

이번 안장식을 계기로 농민군이 외친 인간존중과 만민평동의 거룩한 동학정신이 오래도록 후대에 계승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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