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이 발발 40일 만에 한양, 개성, 평양이 무너지고, 일격에 전주성을 삼키려고 웅치로 진격한 왜적을 김제군수 정담, 남해현감 변응정의 장렬한 전사로 승리를 하였고, 이치전투에서도 권율과 황진의 부대가 왜군을 섬멸하여 왜군들의 전주성 입성을 저지하였다.

풍전등화의 국난에 충경공 이정란장군은 70세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700여명 의병을 모아 ‘전주성이 무너지면 호남이 위태롭고, 호남이 무너지면 나라 일은 끝장난다.

우리는 마땅히 신하된 몸으로 전주성과 더불어 생사를 함께해야한다’며 의병들과 전의를 다짐하고 남고산성을 고치고 진격해 오는 왜놈들의 길목을 막아 전주부성을 왜적들이 그렇게 밟고 싶어 했으나 지켜 낸 의병장 이정란 장군과 집안 동생 이영남 장군은 원균이 패전하고 전선과 군기를 수장하고 도망치러하자 ‘사또 사또는 왕명으로 수사가 되었소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가다니 절대로 불가하오 후일 도망죄로 문죄하면 뭐라고 변명하겠소 이순신에게 청군하여 싸우다가 이기지 못할 때 도망친들 뭣이 늦겠소’ 병졸이 장군에게 목숨을 걸고 간한 충렬의 기개, 전주성의 조선실록을 정읍으로 옮긴 손 흥록이 있어 조선500년을 온전히 보존, 전라도 백성들은 전라도에 왜군이 발을 들여 놓지 못하도록 하고 군량미와 병졸을 지원한 것이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힘의 바탕 이었다는 주장에 공감과 동의를 표한다.

표옹 송영구 선생과 주지번의 만남은 진정한 사제의 정을 알려주었고 양국의 문화교류로 이어지면서 호탕하고 힘이 넘치는 풍패지관, 망모정이란 문화와 양택과 음택의 정을 익산에 남기고 지금까지 전해오는 선비의 정신이다.

원교 이광사, 추사 김정희, 창암 이삼만은 조선3대 서예가이다, 지방인 전주에서 활동하던 창암은 조선은 물론 중국에도 창암의 유수체로 묵의 향을 전파하였고, 효산 이광열, 설송 최규상 등 서예가들의 눈부신 활약과 근대 강암 송성용의 묵향에 취해 중국 섬서성 서안의 서예가가 전주에 있는 동안 여러차례 강암서예관을 찾아 간 것은 이 지역의 묵향이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는 예술 정신이다.

시대를 앞서간 사상가 정여립은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무사, 관속, 천민, 상하 모든 사람들과 사귀며 대동계를 조직하여 매월15일에 모여 활쏘기 등 무예를 닦았는데 정감록이란게 민간에 번져 쿠데타로 이씨왕조를 무너뜨릴 계획일 일 것이라 하여 조정에서 정여립 체포령을 내리자 진안 죽도로 몸을 숨겼다가 아들을 먼저 죽이고 자신은 칼을 꼬자 놓고 자진하면서 정여립 난을 진압한 기축옥사라 하며 많은 전라도와 서북 인사들이 연루되었다하여 조정에 진출할 기회가 줄어들었다고 하나 후세 학자들은 쿠데타라기보다는 당쟁의 희생양이라 주장하는 사상가 정여립의 대동계 정신이다.

동학혁명은 인내천의 평등사상을 근본으로 보국안민, 제폭구민을 기치로 부패하고 타락한 관료들로 인해 발발하였으나 전주화약으로 민관 협력의 집강소 설치는 근대 민주주의 시작이요 협치의 결정체였으며 3.1운동, 4.19학생의거, 6.10만세, 5.18광주항거, 촛불혁명으로 이어진 민주정신이다. 

금재 최병심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단식으로 일제에 항거 1912년 호남창의대장 이석용이 독립밀맹단을 조직하고 각 지역을 분담할 때 전주지방을 맡아 의병활동, 옥류정사가 항일사상의 중심지로 간파한 일본군에 단식으로 강탈에 항거, 전라선 철로 개설을 이유로 민족정기를 끊기 위해 한벽당 철거를 강행한 일본군에 저항하여 한벽당을 지켜 낸 선비의 기개와 정신 등이 면면히 이어오며 스며든 전라도정신이라 주장한다.
 
/한중문화협회 박영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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