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500년간 전라도 호령
1951년 한국전쟁중 무너져
복원논의 20여년만에 우뚝
찬란한역사 전북시대 기대

조선왕조 500년 동안 전라도를 다스렸던 전라감영이 복원돼 옛 위용을 되찿았다. 전라감영이 전북과 전남은 물론 바다 건너 제주까지 다스린 관청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이번 복원으로 전주시민과 전북도민의 자긍심을 높일 것이라는 기대감이다. 깜깜한 밤을 밝히는 전라감영의 불빛이 전북의 찬란한 역사를 바탕으로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것을 다시 한번 희망해 본다./이원철기자
조선왕조 500년 동안 전라도를 다스렸던 전라감영이 복원돼 옛 위용을 되찿았다. 전라감영이 전북과 전남은 물론 바다 건너 제주까지 다스린 관청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이번 복원으로 전주시민과 전북도민의 자긍심을 높일 것이라는 기대감이다. 깜깜한 밤을 밝히는 전라감영의 불빛이 전북의 찬란한 역사를 바탕으로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것을 다시 한번 희망해 본다./이원철기자

조선왕조 500년 동안 전라도를 다스렸던 전라감영이 복원돼 옛 위용을 되찾았다.

비록 조선시대 때의 완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관찰사가 업무를 본 선화당 등 핵심 건물들을 갖추고 우리 앞에 나타났다.

전라감영이 전북과 전남은 물론이고 바다 건너 제주까지 다스린 관청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전라감영 복원은 전라도 중심이었던 전주와 전북의 위상을 되돌라보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

동시에 전주시민과 전북도민의 자긍심을 높일 것이라는 기대감도 생기고 있다.



▲조선왕조 500년 전라도 통치

전라감영은 오늘날 전북과 전남, 제주까지 다스린 관청이었다.

감사(監司), 도백(道伯) 등으로도 불렸던 관찰사가 행정권, 군사권, 사법권까지 강력한 권한을 행사한 곳이었다.

전라감영에는 관찰사가 업무를 본 선화당과 휴식을 취한 연신당을 포함해 관찰사 가족들이 지낸 내아와 내아 행랑, 비서실장 격인 예방비장이 근무하는 응청당, 보좌관 격인 비장들의 집무실인 비장청 등이 있었다.

관찰사 심부름꾼이자 전주대사습놀이 주역으로 알려진 통인들 대기소인 통인청, 약재를 다루는 심약당, 법률을 다루는 검률당, 한지를 만드는 지소, 책을 출간하는 인출방, 진상품 부채를 만드는 선자청도 있었다.

전라감영은 약 1만2000평에 달하는 부지에 40동 이상의 건물이 있는 거대한 공간이었다.

다른 지역 감영들이 임진왜란 등으로 장소를 이리저리 옮긴 것과 달리 전라감영은 조선왕조 500년 내내 전주에서 떠나지 않았다.



▲‘전라도의 중심’ 전주의 위상

전라감영이 나주가 아닌 전주에 설치된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 이유는 전주가 한양에서 가까웠기 때문이다.

세종실록에는 ‘평안도 평양감영, 전라도 전주감영, 강원도 원주감영, 황해도 해주감영 등이 모두 서울에서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기록이 있다.

전주가 교통의 요지이자 물산이 풍부했다는 것도 이유였다.

‘감영을 설립할 곳으로 나주는 하도(下道)에 치우쳐 있어 온편치 못하고 전주는 상도(上道)에 치우쳐 있으나 영남과의 접경이 멀지 않으며 호서와도 가깝고 물력(物力)도 나은 듯하다’는 선조실록 기록이 있다.

전주가 조선왕조의 발상지라는 것도 주된 이유로 꼽힌다.

전주는 전주이씨 시조인 이한(李翰) 등 태조 이성계의 선조들이 살았던 곳이다.

비슷한 예로 함경감영이 있다.

함경감영은 함흥에 설치됐다 영흥을 거쳐 다시 함흥으로 옮겨졌는데, 함흥은 태조가 살았던 곳이고, 영흥은 태조가 태어난 곳이다.

전라감영이 다른 감영과 달리 단 한 번도 다른 곳으로 옮겨지지 않았던 사실은 전주의 위상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조선시대 때 전라도 최고 도시는 전주였고, 그 다음이 나주였다.

그러나 전주는 1896년 전라도가 전북과 전남으로 나뉘고 제주가 분도하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전라감영은 1951년 한국전쟁 중 폭발사고로 완전히 사라졌다.



▲옛 위용 드러낸 전라감영

전라감영이 사라진 지 1년 뒤인 1952년 감영 자리에 전북도청사가 들어섰다.

전라감영 복원 논의는 이 전북도청사 이전 계획이 확정된 1996년부터 시작됐다.

전라감영은 한국전쟁 중 폭발사고로 사라진 지 약 70년 만에, 복원 논의가 시작된 지로부터는 20여년 만에 옛 위용을 되찾아 우리 앞에 나타났다.

새로 태어난 전라감영에는 선화당과 내아, 내아행랑, 관풍각, 연신당, 내삼문, 외행랑 등 7동의 핵심건물이 들어섰다.

무엇보다 웅장한 외관과 우아한 곡선의 팔작지붕이 돋보이는 선화당이 눈에 띈다.

선화당 내부에는 1884년 전라감영을 방문한 미국 공사관 무관인 조지 클레이튼 포크(George Clayton Foulk)의 사진자료를 재현한 6폭의 디지털 병풍이 있다.

선화당 동쪽에는 관찰사가 민정과 풍속을 살피던 누각인 관풍각이 있다.

이곳에서는 시간여행(타임슬립) 만리경을 통해 관찰사 순력(巡歷, 관찰사가 관할 지역을 순회하던 일)을 한 내용을 볼 수 있다.

선화당 북쪽에서는 200년 된 회화나무가 새로 지어진 전라감영을 내려다보고 있다.

회화나무 근처에는 관찰사가 휴식을 취하던 연신당이 있고, 관찰사 가족들이 지내던 내아와 내아행랑이 있다.

발굴조사 과정에서 확인된 우물이 복원됐고, 다가공원에 있던 전라감사 선정비도 옮겨졌다.



▲새로운 전북시대 연다

전라감영 복원은 단순한 건물 복원을 넘어선 의미가 있다.

전주문화유산연구원은 2016년 11월 전라감영 발굴조사 결과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옛 전북도청사 부지가 단지 조선시대의 전라감영 부지일 뿐만 아니라 통일신라 때부터 1300여 년간 관청 자리였음을 보여주는 유물이 다수 출토됐다”고 밝혔다.

전주(全州)라는 이름은 통일신라시대인 756년(경덕왕 15)에 처음 생겼다.

전북과 전남, 광주에서는 2018년 전라도 1000년을 계기로 전라도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한 다양한 사업을 벌이고 있다.

전북에서는 전라도가 전북과 전남으로 나뉘고 제주가 분도하면서 쇠퇴의 길로 접어든 전주와 전북의 위상을 다시 살리려 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500년 동안 전라도를 다스렸던 전라감영이 복원된 것은 그 의미가 남다르다.

전라감영 복원을 계기로 가야와 백제, 후백제, 동학농민혁명 등 전주와 전북의 찬란한 역사를 바탕으로 새로운 미래를 열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전주시는 복원된 전라감영에서 역사적 지식을 바탕으로 한 투어와 게임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이다.

전라감영 진상품을 손수 만드는 체험 교육과 전통음악 공연도 할 예정이다.

전주대사습놀이 무대도 만든다.

김승수 전주시장은 “전라감영은 전주라는 도시의 역사적 무게를 오롯이 담고 있는 공간이자 동학농민혁명의 위대한 뜻을 최초로 실현한 공간이며, 전라도의 역사를 품어 안은 귀한 장소로서 의미를 갖는다”고 말하고 “단순한 건물 복원이 아닌 전주의 정신과 가치, 전라도의 삶을 함께 복원하고 재창조하여 대한민국은 물론 전 세계인들에게 전라도 정신의 정수를 체험하는 공간으로 자리매김 시키겠다”고 강조했다.

/김낙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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