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합리한 세상을 바로잡고자 했던 그
차별없는 세상을 향한 염원 담아내

천재 작가이자 혁명가 그리고 자유인, 새로운 세상을 꿈 꾼 허균이 다시 돌아왔다.

한 시대의 아웃사이더이자 불우한 천재 중의 천재 허균은 신정일의 ‘천재 허균’으로 역사 속 긴 침묵을 깨고 세상이 다시 나왔다.

지체 높은 집안에서 태어난 허균은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당대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생각을 가지게 된다.

세상을 개혁하려다 날선 칼날에 그 꿈을 펼치지 못한 채 비운의 생을 마감한 허균.

하지만 후세들은 이런 허균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한다.

기껏해야 ‘홍길동전’ 저자로만 알려져 있다.

허균은 조선의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허엽은 동인의 영수였고, 배다른 형제지만 누구보다 허균을 아낀 큰형 허성은 정치가이자 문장가로 이름났던 인물이다.

둘째 형 허봉 역시 당대의 빼어난 문장가이자 아버지의 뒤를 이은 동인의 영수였으며 누이 허난설헌은 조선이 낳은 여류 시인으로 오늘날까지 그 이름이 기억되고 있다.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허균 또한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기억력도 뛰어나 한번 본 것은 잊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뛰어난 집안의 자제가 어울려 지냈던 사람들은 뜻밖에도 서얼 출신이거나 천민 출신, 기생 등 시대의 제약에 뜻을 펼치지 못하는 이들이었다.

사대부들은 허균의 행동을 기행이라 여겨 비난했으나 허균은 당대의 모순과 불합리를 인지하여 이를 개조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러한 뜻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인 ‘홍길동전’으로 이어졌다.

허균이 자신의 개혁사상을 가장 많이 표출한 글이 바로 ‘호민론’이다.

허균은 이 글에서 신분 차별이 없는 새로운 이상향을 꿈꾸었다.

그는 잠자는 민중을 이끌고 나가는 지도자를 호민이라고 보았고, 그런 이유로 글의 첫 부분은 “천하에 두려워해야 할 바는 오직 백성일 뿐이다”라고 시작한다.

그런데 당시 조선 벼슬아치의 부패는 극에 달해 있었다.

백성과 이익을 다투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뇌물을 받는 것도 당연시되었던 사회였다.

허균이 저작한 ‘홍길동전’의 홍길동도 ‘호민’으로서 민중을 이끌고 나아가 이상국을 건설했던 인물이며, 허균 또한 누구나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염원하였다.

불합리한 세상을 바로잡고자 한 것은 그의 일생을 관통하는 하나의 큰 사상으로 정립되었고, 세상의 흐름에 반대되는 ‘역적’의 길로 인도했다 조선의 천재 허균을 다시 세상에 내놓은 것은 문화사학자 신정일에 의해서다.

문화사학자로 역사 관련 저술활동을 전개해 가고 있는 작가이자 도보여행가인 신정일은 1980년대 중반 황토현문화연구소를 발족해 동학과 동학농민혁명을 재조명하기 위한 여러 가지 사업들을 펼쳤다.

1989년부터 문화유산답사 프로그램을 만들어 현재까지 진행하고 있으며, 동학농민혁명 백주년 기념사업회에 참가했다.

또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였던 김개남, 손화중 장군 추모사업회를 조직하여 덕진공원에 추모비를 세우는 데 노력하기도 했다.

2005년 시작된 사단법인 ‘우리땅 걷기모임’의 대표를 맡고 있으며 포털 Daum에 있는 ‘우리땅 걷기모임’ 카페에 글을 지속적으로 올리고 있다.

현재는 산림청 정책자문위원으로 대기업과 지자체에서 강연을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 ‘조선을 뒤흔든 최대의 역모사건’, ‘똑바로 살아라’, ‘그곳에 자꾸만 가고 싶다’, ‘대한민국에서 살기 좋은 곳 33’, ‘섬진강 따라 걷기’, ‘새로 쓰는 택리지’(전10권), ‘대동여지도로 사라진 옛 고을을 가다’(전3권) 등 60여 권이 있다.

/조석창기자 

저작권자 © 전북중앙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