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가치와 애국선열을 돌아보다
문화재 가치와 애국선열을 돌아보다
  • 전북중앙
  • 승인 2021.02.18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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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 점암촌 백방산 자락 위치
하서 김인후 후학양성 강학당
임진왜란때 소실 자손 김시서
1680년 자연당 이름으로 복원
순창군 유학의 전통문화 교육
영광정 독립운동가 김원중
항일운동 집회 장소 주무대
1991년 해체 복원된 모습

명절 연휴 이후 2주간 새롭게 적용된 거리두기가 1.5단계로 하향되었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완화되었다고는 하나 코로나가 종식되지 않은 한은 아무래도 방역에 신경 쓰이지요.

그런데 집콕이 너무 답답해서 조심스럽게 오랜만에 외출을 했습니다.

외출한 김에 순창 쌍치면까지 다녀왔는데요, 쌍치면에는 하서 김인후 선생이 후학 양성을 위해 지은 강학당인 훈몽재 유지가 있었습니다.

전라북도 지정문화재자료 제189호로 지정된 곳이기도 합니다.

훈몽재 유지와 돌아오는 길에 만났던 영광정을 소개하겠습니다. 

 

# 하서 김인후 선생의 훈몽재

사회적 거리두기 방역 안내문이 세워진 겨울의 훈몽재는 인적이 거의 없을 정도로 한적했습니다. 

봄에만 하더라도 훈몽재에서 출발해 섬진강 물줄기를 따라 낙덕정까지 걷는 ‘선비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던 곳이었는데 너무 한적해 쓸쓸하기까지 합니다. 

훈몽재는 하서 김인후 선생이 명종 3년(1548년)에 순창 점암촌 백방산 자락에 후학 양성을 위해 지은 강학당입니다.

하서 선생은 제12대 인종 임금의 세자시절 스승이며, 호남출신으로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된 조선 중기 대표적 성리학자입니다.

하서 김인후 선생의 훈몽재는 송강 정철, 월계 조희문, 고암 양자징, 호암 변성온, 금강 기효간 등 명재상과 학자들을 배출한 우리나라 유학 발전의 기틀을 만든 곳입니다. 

최초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훈몽재는 선생의 5대손인 자연당 김시서에 의해 1680년 경 원래의 터 인근에 ‘자연당’이라는 이름으로 복원되었다가 퇴락하였습니다.

지금의 훈몽재는 순창군에서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예절, 유학 전통문화 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2009년에 중건한 것이라고 합니다. 

 

# 훈몽재와 부속 건물들(삼연정, 대학암, 양정관, 자연당)

훈몽재 입구에서 가장 먼저 만난 삼연정은 하서 선생의 문학적 사상인 ‘삼연(三然 )산, 수(水), 인(人)’을 구현한 정자입니다. 

하서 선생이 지은 1,600여 수의 시에 가장 많이 언급된 내용인 ‘삼연’에서 그 명칭을 따 왔다고 합니다.

하서 선생의 사위이자 제자인 고암 양자징의 48영시 중 14번째 ‘원규투류(담장 밖에서 뚫고 가는 물이 흐름을 엿보다)는 ’삼연‘이 잘 드러난 시라고 알려져 있다고 합니다. 

삼연정 아래로 내려가는 길은 선비의 길이 시작되는 곳인데요.

추령천변 앞에 30여 명이 앉을 수 있을 정도의 평평하고 넓은 바위가 있습니다.

하서 김인후 선생의 문하생이었던 송강 정철의 친필로 ’대학암‘이 암각화 되어 있습니다.

이곳에서 하서 선생이 정철을 비롯한 많은 제자들에게 <대학>을 강의했다고 합니다.

송강 정철은 훈몽재에서 13세까지 공부했다고 합니다.

훈몽재 앞마당에는 커다란 지석묘가 있었습니다.

훈몽재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에 만들어진 남방식 지석묘로 남북방향으로 놓여 있으며 길이 4.9m, 폭 2.43m, 높이 1.4m로 규모가 큰 편이라서 권력을 가진 자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곳 훈몽재 터는 청동기시대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아왔던 곳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고 해요. 

지석묘를 중심으로 오른쪽의 양정관은 매산 홍직필의 훈몽재기에 수록된 하서 선생의 교육이념인 ’몽이양정(어리석은 사람을 바르게 기름)‘에서 따왔는데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한학, 한문, 예절교육 등)과 학술회의 등의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 교육관입니다. 

왼쪽은 자연당으로 하서 선생의 5대 손인 김시서 선생이 원래의 훈몽재를 수축하고 그 옆에 초당을 짓고서 하서 선생의 ’자연가‘의 뜻을 취하여 ’자연당‘이라 이름하고 하서 선생의 유업을 계승하였다고 합니다.

’훈몽재 복원사업‘을 통해 훈몽재의 부속건물로 중건되었습니다. 

자연당의 뒤에는 양생당으로 오래 살기 위하여 몸과 마음을 편안히 하고 병에 걸리지 않게 노력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곳으로 취사, 샤워, 세탁 등 편의시설이 갖추어진 공간입니다.

현재 복원한 훈몽재는 2005년 전주대학교 박물관의 발굴조사를 통해 원래 훈몽재 터(복원 한 훈몽재 뒤쪽)와 붓솔, 기와류, 자기류, 철제품, 석제품 등을 발견한 것을 토대로 ’훈몽재 복원사업‘을 통해 2009년에 복원 완료한 것입니다. 

 

# 훈몽 강학당의 터-훈몽재 유지

뒤쪽으로 돌아가면  훈몽재 유지가 나오는데 하서 김인후 선생이 1548년에 순창 점암촌에 훈몽이라는 이름으로 세운 강학당의 터입니다. 

제12대 인종 임금의 세자 시절 스승이었으나 인종이 세상을 떠나고 윤원형 일파가 1545년에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벼슬을 그만두고 처가가 있는 순창으로 내려와 후학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하서 김인후 선생이 훈몽재에 머물렀던 시기는 1548년부터 그가 부친상을 당하여 장성으로 돌아간 1549년까지 약 2년간이었다고 합니다.

이후 1680년경 5대 손인 김시서가 인근에 자연당을 짓고 기거하며 훈몽재를 중건해 후학을 양성하였으나 다시 퇴락하였답니다.

1820년경 김인후 후손들이 점암마을에 훈몽재를 중건하고 어암서원을 건립해 김인후, 김시서, 정철, 이의 위패를 봉안하였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페령에 의해 훼철되었답니다.

일제강점기에 다시 중건되었으나 1951년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졌다고 해요.

발굴조사 결과 표토층의 10~20cm 아래에서 훈몽재 유지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확인되어 현재는 복토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훈몽재 유지 옆에 현재의 훈몽재를 새로 중건했다고 합니다. 

훈몽재 유지와 복원된 훈몽재를 둘러보면서 하서 선생의 학문적 업적과 정신을 전승 발전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후세에게 전해지고 있는 것에 자부심이 느껴졌습니다.

예절, 유학 전통문화 등 접하기 어려운 학문을 배울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은 소중한 문화재 전승의 한 방법이 될 것입니다. 

 

# 빼앗긴 나라를 구하고자 모였던 항일운동의 집회 장소-영광정

훈몽재를 뒤로하고 돌아오는 길에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34호인 영광정에 잠시 들렀습니다.

영광정은 이 지방 출신 독립운동가인 김원중이 8명의 독립운동가와 뜻을 합하여 광인 행세를 하며 일본인들의 감시를 피해 은밀히 이곳을 근거지로 항일 투쟁활동을 전개하였다고 합니다.

항일운동의 집회 장소였던 이곳, 쌍치면 둔전리 추령천 옆 ’기룡암‘ 위에 정자를 세우고 이름을 영광(迎狂)정이라 했습니다.

건물 처마 끝에 태극 팔괘를 도각하여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이들의 굳센 의지를 담았다고 합니다.

한국전쟁 때 쌍치면 관내의 모든 건물은 불에 탔는데 이 정자만은 소실되지 않았다고 해요.

노후된 영광정을 1974년에 순창군에서 보수했는데 1991년에는 담양-정읍 간의 도로 확장공사로 해체 복원해 현재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소박한 정자지만 바위에 굳건하게 세워진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추령천의 단단한 얼음과 바위에 세워진 영광정의 모습이 갖은 어려움 속에서도 굴하지 않았던 애국선열들의 굳은 애국정신을 나타내는 듯해 숙연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겨울이라는 계절이 주는 고요함에 때문일까요, 오랜만의 외출이 문화재의 역사적 가치와 숭고한 선조들의 애국정신까지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하서 김인후 선생 훈몽재(訓蒙齋)>
주소; 전북 순창군 쌍치면 둔전 2길 839둔전리 45-1)
휴관일 :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추석 연휴
문의: 063-652-0076 / 653-0053

<영광정>
주소: 순창군 쌍치면 시산리 산367

/전북도 블로그기자단 '전북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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