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대한 기술 방법은,‘사실로서의 역사’와‘해석으로서의 역사’로 나뉜다.

중학교 역사 교과서 첫 단원에 나오는 설명이다.

‘사실로서의 역사’는 사실 파악에는 유용하나 역사적 의미는 소홀할 우려가 있고,‘해석으로서의 역사’는 개인의 판단으로 역사를 왜곡할 여지가 있다.

어떤 역사기술도 완벽해 보이지 않는 것은, 어떻게 기술되느냐에 따라 현재와 미래를 좌우할 힘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떤 역사도 쉽게 말할 수 없다.

특히 다른 나라의 역사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하버드대 교수인 존마크 램지어 교수의 망언이 계속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자발적 매춘부로 몰아붙여 기함을 치게 만들더니, 자신을 일본의 유일한 희망으로 스스로 치켜세우고, 최근엔 일본 극우단체의 학술대회를 통해 자신에 대한 비판이‘학문적 암살 미수’라고 우기는 데는 더 할 말이 없는 듯하다.

객관성과 합리적 판단력을 상실한 학자를 누군들 신뢰할 수 있을까?  역사에 대한 가치판단은 시대에 따라 다르겠지만, 분명히 지켜져야 할 인류 보편의 가치 기준은 있다.

인간에 대한 존중, 자유, 평화가 그것이다.

램지어 교수의 논문‘태평양전쟁에서의 성 계약’은 그 가치 기준을 깡그리 무시했다.

하버드대의 한국학 교수 카터 에커티 교수의 표현에 따르면 “경험적, 역사적, 도덕적으로 비참할 정도로 결함이 있다”의 수준의 것이다.

더구나 이 논문이 실린 학술지가 하필 국제법경제리뷰라는 점에서 기가 막힐 따름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대만, 중국, 인도네시아, 필리핀과 같은 점령지의 여성들을 강제 동원하여 폭행, 억압 등 인권유린을 일삼다 집단 학살도 서슴지 않은, 동아시아 식민주의와 민족주의의 부정적 잔혹성을 드러내는 야만적 사건이다.

그럼에도 이를 경제학적인 측면에서 보수를 받은 노동이나 일거리 정도로 해석한다는 것은 인간에 대한 모욕이다.

이 문제의 핵심은 정치적 갈등이나 감정적 싸움이 아니다.

이것은 일본이 침략전쟁의 진실을 외면하고 진정한 반성도 없이, 태연히 민주주의와 선진국을 표방하는 역사의 모순에 대한 청산이다.

역사는 반복된다.

과오의 청산 없이는 더욱 그렇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허울 좋은 배상이나 몇 마디의 사과가 아니다.

일본이 그들의 과오를 똑똑히 인식하고, 그로 인해 상처받은 이들에 대한 진정한 위로를 건네기를 바란다.

그래야만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아울러, 램지어 교수의 망언이 개인의 의견이라고 치부할 것이 아니다.

아무리 터무니없는 헛소리도 반복되면 진실을 흉내내기 쉽다.

그와 같은 쉬운 말이 역사논평의 탈을 쓰고 떠돌지 않도록 우리가 먼저 깨어있어야 한다.

다양한 방식으로 역사의 진실을 알리고, 인본주의의 가치가 미래에까지 이어져갈 수 있도록 국제사회와 긴밀히 소통해 가야 할 것이다.

글로벌 시대의 세계의 역사는 이제 하나로 이어져 있다.

서로가 역사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며 상처를 인정하고, 치유와 성장을 위해 대담하고 용기 있게 나아갈 수 있기를 간곡히 희망한다.

/심규문 전주시의회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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