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와 전북] 3










[DJ와 전북]
3. 집권 5년

15대 대선이
치러진 1997년 12월18일 저녁. TV 개표가 시작되면서 당시 국민회의 2층 기자실은 박수와 환호 소리로 분위기가 고조돼 갔다. 주요 당직자들도
기자실로 몰려 와 ‘50년의 한을 풀고 있는’ 역사적 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저녁 9시쯤 박지원 특보가 캔맥주와 오징어, 땅콩을 양손 가득히 들고 기자실에 들어 왔다.
“수고했어요.” 그는 연신 고맙다며 기자들에게
캔맥주를 돌렸다. 그의 눈 뿐만 아니라 당직자들, 친DJ성향의 기자들까지 이내 눈시울은 붉어졌고 이슬이 맺혀졌다. 그렇게 환희속에 시작된 국민의
정부 5년은 오늘 마지막 날을 맞았고 이제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게 됐다.        

◇위상 급상승한 정치

DJ 정부 출범과
함께 가장 탄력을 받은 부분은 정치쪽이었다. 국회의원부터 도지사, 시장 군수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이 DJ당 소속이었고 전북도민들 역시 압도적으로
지지를 보냈다. 그러나 처음부터 정치쪽이 배려된 것은 아니었다. “이제 전북도 제대로 대접 받는 시대가 열렸다”는
도민의 기대에도 불구, DJ는 첫 조각에서 전북 출신을 배제하는 푸대접으로 ‘역차별론’을
불러 일으킨 것. 첫 조각 이후 전북의 반발이 거세지자 DJ는 즉각 정균환 전북도지부장을 집권당 첫 사무총장에 전격
발탁했다. 정치권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카드였다. 당시 초미의 관심사였던 사무총장에 정 도지부장이 임명되면서 전북의 반발은 수그러 들었고, 이후
DJ는 전북출신 인사들을 대거 입각시키는 등 광주 전남과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했다.

정치인 중에서도 정균환 의원의 경우 첫 사무총장에
이어 두 번에 걸친 집권당 원내총무, 총재특보단장 등 핵심 요직을 두루 거쳤고 15대 총선에서는 이른바 ‘젊은
피’ 수혈을 통해 정치권에 새 바람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특히 이 기간동안 장영달 정동영 정세균 장성원
이강래 의원 등이 집권당의 주요 당직을 맡아 전북 정치권의 위상을 더욱 굳혔다. 전주 출신의 조세형 주일대사도 집권당의
총재권한대행을 맡았으며 유종근 전 도지사는 DJ의 핵심 경제 브레인으로 IMF 극복의 최선봉에서 활약했다.

청와대와 정부에서도 전북 출신 인사들은 눈부시게
약진했다. 한광옥 민주당 고문이 민족화해협력범국민회의 의장에 이어 청와대 비서실장을 맡았고 신건 국정원장, 진념
재경부총리, 정세현 통일부장관, 전철환 (전)한국은행 총재, 이남기 공정거래위원장, 오홍근 (전)국정홍보처장, 이무영 (전)경찰청장, 라종일 주영대사,
강봉균 (전)청와대 경제수석 등도 중용됐다.

한편 DJ 정부
집권 후반기에 들어선 이후 도내 정치권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16대 대선 과정을 통해 노무현 민주당 대선 후보를 중심으로 양분된 것. 친노와
비노·중도로 갈리면서 대립각이 형성됐고 특히 노무현 후보 당선 이후에는 신구주류로 완전히 세력이 재편돼 반목과 갈등이 지속됐다. 노무현 시대 개막과 함께 김원기 정동영 등 신주류측 의원들과 DJ측의 정균환 이협 등 구주류측 의원들로 구분된 것. 하지만
DJ 정권에서 “전북 정치권의 위상이 기존에 비해 수직상승했다”는데 대해서는 별다른 이견이 없다. 

◇외화내빈의 전북도정

DJ 정권에서
가장 애를 끓였던 것은 단군이래 최대 규모라는 전북의 청사진 ‘새만금사업’이었다. 환경단체의 줄기찬 반대에 부딪혀 좌초 직전까지 이르렀던 새만금사업은 DJ 정부에서만 최소 2년여 표류했는데, 민관합동조사단의
조사와 “환경친화적으로 사업을 추진한다”는 정부의 최종 결정으로 기나긴 암흑의 터널에서 벗어났다.

새만금과 함께 핵심사업이었던 용담댐은 지난 2001년에 완공됐고 숙원사업이었던 김제신공항 건설사업 역시 우역곡절을 겪었지만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경부축과 함께
한반도의 물동량을 양분시키는 효과를 지닌 서해안고속도로도 2000년 개통되면서 전북을 서해안시대, 환황해권시대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이처럼 DJ 정부에서
전북은 SOC 분야의 굵직한 대형사업들이 완공되거나 첫 삽을 뜨는 등 외형적으로는 만족스런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된다. 실제로 국가예산 확보액을
예로 들면 2003년도 2조3천억여원을 확보해 최초로 2조원 시대를 열었고, 이 같은 규모는 국민의 정부 출범 당시와 비교하면 무려 50% 가까이
증가한 것.

그러나 화려한 외형과는 달리 내면적으로는 복합적인
여러 문제점들을 해결하지 못했다.

새만금 용담댐 등 기존 사업 외에 대규모의 신규
국책 사업이 사실상 전무했던 점, 타 시도와 비교할 때 특화산업에 대한 집중적인 지원이 없었던 점 등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전북도정의 책임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DJ정부에서도
떠나는 도민을 잡지 못했다. 전북이 마지노선으로 여겼던 ‘200만 도민’ 시대가 붕괴되면서 지난 연말 기준으로 인구는 196만명에 머무르고 있다. 97년 말, 200만7천명으로 출발했던 도민수가
200만명선을 들락거리다가 결국 붕괴된 채 노무현 정부로 들어서게 된 것.

더욱이 지자체의 재정자립도를 기준으로 하면 전북의
경우 도는 물론 14개 시군 모두 최하위권에 머무르고 있다. 전북도는 16개 시도별 2003년 일반회계 기준으로
18.0%에 그쳐 꼴찌 전남에 이어 15위를 차지, 낙후 지역의 대명사라는 오명을 벗지 못했다. 이 같은 현상은 국민의 정부 내내 지속된 것이었고
결국 전북은 DJ정부 5년 동안 화려한 외형적 성장과는 달리 내부적으로 빈곤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서울=김일현기자
cindy@  

 

 

[박스] 유종근

국민의 정부와 전북을 논할 때,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이 새만금사업과 유종근 전 도지사다. DJ의 구상으로 시작된 새만금사업은 유 전 지사와 특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그가 민관합동조사단 구성을 제안하면서 백지화 논쟁에 휘말렸던 것. 다행히 정부가 ‘지속적인
추진’으로
최종 입장을 정리해 그는 책임론에서 다소 벗어나기도 했다.

미 럿거스대 교수 출신의 경제학자인 유 전 지사는
사석에서 “20여년간 DJ를 모셨다”고 말할 정도로 DJ의 분신이었다.
실제로 그는 DJ의 핵심 경제 브레인이었고 국민의 정부 출범과 함께 국내외를 망라해  DJ의 경제기조인 ‘DJ노믹스’를
설파하고 다녔다. 특히 김대중 대통령의 경제고문이라는 막강한 위치에서 IMF를 조기 극복하는데 상당부분 기여했다.


전북도정을 7년간
이끈 그에게 시련이 닥쳐온 것은 고관집 절도사건이었다. 1999년3월 터진 이 사건은 절도범 김강룡의 말 한마디에 전국이 뒤흔들렸고 유 전 지사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가했다. 결국 그는 대통령 경제고문직에서 해촉된다. 동시에 불거진 소방헬기 무단 사용과 서울 관사의 사적 이용 의혹으로 그는
적지않은 비난을 받았고, 특히 2002년초 동계올림픽 국내 후보지 경쟁에서 강원도에 패배하면서 정치적 위상이 급격히 하락했다.

유 전 지사는 이 같은 여러 난관에 직면하자
위기의 돌파구로 16대 대선 민주당 후보 경선에 나서는 대모험을 강행한다. 그러나 경선 결과는 신통치 못했고, 과거
세풍그룹으로부터 뇌물을 수뢰한 혐의로 영어의 몸이 되기도 했다. DJ와 함께 급격히 부상했던 유 전 지사. 전북도민에게 그는 DJ와 영욕을 같이
한 인물로 오랫동안 각인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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