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조 전북시인협회 회장
/김현조 전북시인협회 회장

‘부처님 오신 날’을 기념하기 위해 7명이 2대의 차량으로 보은군 속리산 법주사를 방문하여 참배하였습니다. 정이품송 벼슬을 하고 있는 소나무님에게도 안부를 물었고, 한참 아래로 내려와 1만 평이나 되는 넓은 선병국 선생의 집을 방문하여 주인과 대화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산성 중에 정확하게 축성한 날짜가 남아있는 삼년산성을 답사하였습니다. 늦은 시간이라서 귀가를 서둘러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는데, 신정일 선생님께서 부음을 알리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일순간 동승한 사람들은 서로 말을 하지 않았고 한참 동안 침묵하였습니다. 

80년대를 젊은이로 살았던 세대에게 김지하 선생님은 일반 시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선구자였고 정신적 스승이었으며 투사였습니다. 도망자였고 영어의 몸이었지만 언제나 젊은이들은 그와 끈이 닿기를 바랐습니다. 젊은이들은 학교에서 거리에서 김지하 선생님의 시를 진짜 시라고 추앙하였고 그의 사상을 좋아했고 따랐습니다. 

70년대 감히 시인이나 언론이나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군부세력에 대항하여 한 줄도 쓸 수 없었던 엄혹한 시절에 시를 통해 실랄하게 풍자하며 비판하였던 용맹한 지식인이었고 투사였습니다. 박정희가 이념으로 정치하며 권력을 단단히 쥐고 있던 유신시대에서 빛나는 지식인이었습니다. 젊은이들은 80년대 오롯이 독재자와 경직된 사회와 왜곡된 한국 사회를 압제하는 친일, 친미 세력에 대항하고 저항했던 사상적으로 선구자였던 김지하 선생님을 따랐습니다. 그는 시인이며 사상가로 서슴없이 정치적 발언하였고, 이념에 대해서도 과감히 비판하였고 자신이 한 말에 대해서 잘못을 시인한 실천가이기도 했습니다. 

깨어있는 사상가였던 ‘민주주의 사상가’ 리영희 선생과 진보적 지식인 백낙청을 ‘깡통’으로 표현하고 야권 단일화를 빗대 ‘개수작’이라며 노골적으로 박근혜를 지지하였던 사건은 당시 사회에 매우 큰 파장을 일으켰고 스스로에겐 ‘변절자’라는 딱지를 붙이었으며 우리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기도 했습니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는 이때 죽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끝내 그의 속사정을 털어놓지 못하고 작별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부르짖었던 ‘오적’을 바르게 하고 그가 ‘타는 목마름으로’ 갈망하였던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했던 한 세대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한국사회의 한 시대를 이끌었던 영웅이 부처님 오신 날에 다시 돌아갔습니다. 전주로 돌아오는 내내 우리는 진심으로 한 시인을 위해 슬퍼하였고 안타까운 마음을 나누었습니다. 특히 고인과 인연이 많았던 신정일 선생은 너무나 슬퍼하였고 괴로워했습니다. 김 시인은 누구보다 동학농민혁명사에 깊은 조예가 있었습니다. 장모였던 박경리 선생이 토지에서 빗댄 김개남에 대해서 깊이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현재는 과거로부터 온 것인데, 현재를 누리는 세대는 과거를 기억하려고 하지 않았고, 풍요롭고 자유로운 현재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만 저부터도 신고를 견디어야 했던 과거가 있었습니다. 수많은 앞선 세대의 젊은이들이 피와 땀으로 민주주의를 이루어낸 현재를 살고 있습니다. 큰 걸음을 걸었던 김지하 선생님은 앞선 자의 슬픔을 겪어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과거에도 김시습과 정여립이 그랬고 허균이라는 선비가 정치적 패배로 인해 재능을 무덤으로 가지고 가야 했습니다. 민중을 위해 민주주의를 위해 살았던 수많은 앞선 세대의 희생에 김지하 시인님께 대표로 감사와 존경을 표합니다. 

저항시인으로 사상가로 생명운동가로 살았던 김지하 선생님을 이제는 추모해야겠습니다. 참 할 말이 많지만 그 분은 최선을 다해 한 생을 살다가 돌아갔습니다. 우리 시인들은 그의 자유로운 영혼과 치열한 시대정신을 높이 평가하며 진심으로 명복을 빕니다.

/김현조 전북시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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