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으로 나뉘어져 있다. 

현대 과학 문명은 보이지 않는 그것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하여 계속된 실험과 수학적 증명을 시도하고 있으나, 그것마저도 변치 않는 진리가 아닌 것이 많다. 

프톨레마이우스의 천동설이 지동설로 변화하는 과정에 약 1,400년이 걸렸다.

이렇듯 한번 고정된 인식의 변화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 희생이 따른다.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하며 '절대진리는 있을 수 없다.' 라는 포용력과 우리가 알고 있거나, 알았다고 여기는 모든 과정이 그저 지극히 개인적인 과정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은 그 시대에서 필요로 하는 가장 본질적인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하며, 또한 궁금함도 가져야 그 과정에 동참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시대정신(Zeitgeist)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면 체육의 본질은 무엇일까?

움직임이며 이것은 죽음과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수단이다.

즉 움직임이란 자연 생명체에게 물과 공기와 같이 인간 생명의 증명에 필수 요소이다.

움직임에는 자의적인 움직임과 수동적 움직임이 있을 수 있다.

원시 시대의 모든 움직임은 살기 위해서 즉 먹거리를 찾거나, 집을 짓거나, 야생동물로부터 가족을 보호하는등 모든것이 능동적 움직임이다. 야생에서의 수동적 움직임은 생을 야생에 의탁하는 삶이며, 즉 생사여탈권을 자연에 넘기는 동물의 삶이다. 

하지만 인간의 수동적 움직임은 사회라는 굴레에 들어서면서 제도가 생기고, 관련된 직업과 업무가 생기면서 살기 위해서 해야만 하는 움직임을 갖게 되었다. 

능동과 수동은 자유와 억압이라는 말과 궤를 같이한다.

또 자유는 야생 또는 전쟁과 본질적으로 같은 말이다. 

절대 자유라는 것은 나 뿐만 아니라 타인도 같은 자유가 있는 것이므로, 욕심으로 폭력을 행사하거나 타인의 물건을 갈취하는 것도 자유인 것이다. 이것이 전쟁이다.

그래서 존스튜어트 밀은 그의 저서 '자유에 관하여'에서 나의 자유를 억제하는 것을 담보로 사회에 안전을 요구하는 것이 국가의 출발이라고 하였다. 

자유의 억제 또한 능동과 수동이 있는데, 능동적 자유의 억제가 '절제'이며, 수동적 자유의 억제가 '법' 또는 '제도'라고 볼 수 있다.

수동적 자유의 이면에는 인간의 ‘성악설’이 있다.

사유가 가능한 인간의 의미에서 생각해보면 두 가지 자유의 차이는 정말 크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을 우리는 '격'이 다르다고 말을 한다.

결론적으로 능동적 움직임을 통해 절제와 강함을 두루 갖춘 인간상의 이상 실현이 체육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수동적 자유의 억제에 대한 해방이 폭력으로까지 연결되는 서구문명의 자유와 나와 남을 생각하는 스스로 절제하는 자유의 품격!!

우리는 코로나 시국에서 전 세계에 이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면 이것이 저절로 갖추어질 수 있는가? 무엇이 이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나? 라는 문제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전북장애인체육회 김성호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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