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조 전북시인협회 회장
/김현조 전북시인협회 회장

수년 전부터 전북에도 가야국이 존재했다며 ‘전북가야’ 발굴사업에 학계는 물론이거니와 관심있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우리 지역에서는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으며 가야사를 새로 써야 한다고 열의가 대단하다. 우리 지역 역사 한자락을 잡은 것 같아 반갑다. 

가야는 김해를 중심으로 한 남해안 지역에 자리 잡았던 고대국가로 해상왕국으로 발전했던 나라이다. 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여섯 개의 나라가 있었는데, 상당한 규모의 국가체제를 갖추었으며 철을 중심으로 해상 무역을 활발히 하며 성장하였으나 결국 신라에 흡수 합병되었다. 

우리 민족에도 많은 신화와 설화, 전설이 있으며 지금까지 면면히 전해오고 있다. 우리 신화는 가장 많은 것이 문명기원설화이다. 문명기원신화란 건국, 농경, 치병(治病) 등과 같이 문화의 기원을 다루는 신화를 말한다. 한국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시조들의 특징은 신격(神格)의 유래이다. 즉 하늘과 땅에서 직접 인간의 세계로 와서 건국시조가 된 경우이다. 고대인의 사유는 일상적인 현상이나 사건을 성스러운 차원과 관련시켜 이해하려는 특성 때문에 건국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거룩한 것으로 비추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김수로왕은 여섯 가야 중 금관가야 왕을 했다. 그리고 김해김씨의 시조로 불린다. 김수로왕은 일생이 신비하고 신화이다. 그의 탄생이 그러했으며 국가 기틀을 마련한 공로가 그러하다. 신라 4대 왕인 석탈해와의 일화와 수로왕의 부인 허왕욱과의 혼인과 둘 사이에 낳은 12명의 자식들에 대한 것이 신비롭다. 

“내가 이곳에 내려옴은 하늘의 명령에 따른 것이니 나의 짝이 되어 왕후가 될 사람도 역시 하늘에서 정해 줄 것이니 그대들은 염려하지 말라.”고 수로왕은 대신들에게 말했다. 그리고 망산도로 가서 기다리면 배가 올 것이고 그 배에 탄 여인을 맞이하여 모셔오라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왕후를 맞이하여 두 사람은 만나게 되었고 혼례를 치렀다. 수로왕과 허황후의 혼인 과정은 매우 특이해서 지금까지도 흥미롭게 한다. 인도에서 온 허황후와 김수로왕의 혼인은 최초의 국제혼인식이었다. 내면을 살펴보면 매우 정치적이었다. 지금도 작은 배로 먼 인도에서 어떻게 왔을까 하는 궁금증이 있지만 허황옥 공주가 가져왔다는 파사석탑은 인도에서만 나는 것이므로 강력한 증거가 되어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고 있다.

김수로왕과 허황옥 공주가 만난 이면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결국 그들은 우리 민족 최초의 국제 혼인식을 올렸고 기록에 의한 최초의 다문화가족이 되었으며 금관가야는 다민족국가로 형성되었고 김해김씨는 두 민족으로 시작되었다. 허황옥 공주는 김해허씨의 시조가 되었으니 김해김씨와 김해허씨는 한민족과 인도 민족으로 시작되었으니 적어도 두 성씨는 단일민족은 아니다. 이쯤 되면 우리 교과서에서 한민족은 단일민족이라는 구절을 삭제해야 한다. 우리는 다민족으로 구성되었음을 당당하게 밝히고 지금부터라도 학교에서 바르게 가르쳐야 한다. 우리는 정치 교육관에 오랫동안 최면 당해왔다. 외국에서 온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주변에서 살펴보라. 다민족의 후손들이 더 심하게 민족간 차별을 하고 있지 않는가. 동남아면 어떻고 중앙아시아면 어떤가. 인간이 인간을 구별하고 우열과 차별하는 것은 히틀러와 같이 우열 민족을 구별하는 옳지 못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이제라도 철저히 반성하고 인간 본연의 심성으로 사람을 대해야 한다. 대부분 종교를 가지고 있으며 입으로는 자비와 사랑을 강조하지만 행동은 아직 따르지 않고 있다. 특히 자녀에게 차별은 나쁜 것이라고 강하게 제지해야 우리나라가 발전할 수 있다. 우리끼리 차별하는 것은 잔인한 짓이다. 

불교 전래는 고구려가 372년(소수림왕2년)에 중국 전진에서 전래되었으며 백제는 384년에 중국 동진에서 전래되었고, 신라는 5세기에 고구려의 묵호자에 의해 전래되었다는 게 정설이다. 아울러 백제는 6세기에 승려 노리사치계를 일본에 보내어 전했다고 한다. 토속 신앙이 난무하였던 삼국시대 초기에 불교가 전래되어 사상을 통합하였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왕실과 귀족들이 먼저 수용하였다. 신라에서는 이차돈의 순교가 있은 다음에 불교 전파가 확장되었다. 

이러한 불교 전래설도 수정되어야 한다. 허황옥 공주가 가야로 올 때 배에는 불상과 파사석탑, 쌍물고기와 삼지창과 오빠인 승려 장유 화상이 같이 와서 이때부터 불교는 전해졌기 때문이다. 장유화상은 금관가야에 장유사(長遊寺)이란 사찰을 짓고 불교를 가르쳤고, 현재에는 장유화상사리탑이 남아있으며 1983년 7월 20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31호로 등재되었다. 

김수로왕과 허황옥 공주 사이에는 10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는 수로왕을 이어서 거등왕이 되었다. 둘째와 셋째는 어머니인 허황옥 공주의 요청으로 김해 허씨를 사사받아 김해허씨시조가 되어 현재까지 번영하고 있다. 그리고 넷째부터 일곱 왕자는 모두 출가하여 장유화상으로부터 도를 전수받아 모두 성불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경남 하동에 칠불암이 있는데, 바로 일곱 왕자가 수행하고 도를 이룬 곳으로 지금까지 사찰로 이어지고 있다. 

1994년경에 고산 안수사를 찾아간 적이 있는데, 고산에 거주하는 주민으로부터 놀라운 기록 얘기를 들었다. 고산향교에는 특별한 기록이 전해오는데 바로 불교전래설이라고 한다. 그 기록에 의하면 우리 지방에는 불교가 185년경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때는 년대가 맞지 않아서 이해되지 않았는데 허황옥 공주의 도래로 인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이제는 우리 역사책도 불교 전래설의 기원을 수정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얼마 전 부처님 오시 날을 맞이하였다. 전주 시내에서 시행한 연등행열도 구경했다. 겸사해서 불교기원을 생각하며 써 보았다.

/김현조 전북시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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