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조 전북시인협회장
/김현조 전북시인협회장

전주와 나주를 합쳐 전라도라 부른다. 

전주는 조선 시대에는 3대 도시였다고 한다. 한성부윤과 평양감사, 전라감사가 요직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장차 전라감사가 되기를 바랐고, 그도 아니면 고부 군수가 되기를 소망했다고 하니 그 위세가 대단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반면 탐관오리에게 전라도는 좋은 먹거리의 대상이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전주가 제주도를 포함하여 전라도 수도였다면 나주는 1896년 광주가 전라남도 행정중심지가 되기 전까지 전라남도를 관장하였다. 고려초인 940년(태조 23)에 나주라 칭했으며 이후 전라도 남부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남부지역 5군 11현을 관장하였으며, 조선 시대에도 16개 군을 관활하였다. 

나주는 두 번의 큰 싸움을 전라도인끼리 하였고, 모두 전라도의 운명을 좌우하였는데, 그 첫 번째가 ‘금성전투’ 혹은 ‘나주전투’라고 한다. 

견훤은 전라도 지방과 충청도 일부를 차지해 후백제라 칭하고 세력을 확장하였다. 궁예는 나주를 중심으로 한 서남해안을 장악해, 후백제가 중국과 통하는 것을 방해함으로써 고립시키고자 하였으며, 백제가 확장되는 것을 막고 분열을 조장하고자 하였다. 궁예는 왕건을 급파하였고 왕건은 나주, 목포, 무안지역까지 내려와 견훤과 세 번 전투하고 모두 승리한다. 견훤이 매번 전투에서 지는 것은 나주에 거주하는 토착 호족(豪族)집단이 왕건편에서 적극적으로 도왔기 때문이다. 

나주는 영산강이 바다와 합류되는 해안지역으로 상대포, 구진포, 영산포 등 중요한 포구들이 있었다. 나주의 대표적인 호족은 나주 오씨, 영암 최씨, 영광 전씨 등이었다. 이들은 대중국 교섭을 하면서 해상세력으로 성장하였고 영산강 유역 토착사회를 구축하였다. 왕건은 나주 오씨와 통혼하여 혜종의 어머니인 장화왕후를 얻었으며, 영암최씨는 대표적 인물로 최지몽을 배출하여 왕건이 전쟁에 나갈 때마다 좌우에서 활약하며 각별한 신임을 받았다. 영광 전씨에서 배출한 인물로는 왕건이 통일한 후 개국공신 반열에 오른 종회(宗會)가 있다. 

나주는 왕건과 한편이 되어 견훤을 괴롭혔으며 후백제가 세력을 확장하지 못하게 하였다. 견훤은 남북으로 왕건의 세력에 협공을 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후백제는 나주세력에 발목이 잡혀 국가의 근심거리로 가장 큰 위협이었다. 나주는 전라도를 첫 번째로 배신한 셈이다.

두 번째 전투는 동학혁명군과의 전투이다.

1894년 1월 10일,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을 응징하기 위해 고부에서 동학군이 기포했다. 사태 수습을 위해 파견된 장흥부사 이용태가 오히려 농민을 탄압하자 고부봉기는 농민전쟁으로 확대된다. 3월 20일 4000여 농민군을 이끌고 무장(고창)에서 다시 봉기했다. 백산(부안군)에서는 ‘앉으면 죽산, 서면 백산’ 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농민군 수는 두 배로 늘어나 있었고 ‘폐정개혁’과 ‘보국안민’을 주장하는 동학농민군으로 가득했다. 4월 7일, 전봉준과 손화중이 이끈 동학군은 황토현(정읍)에서 전라도 감영군을 대파했다. 4월 23일에는 황룡촌(장성)에서 중앙군을 물리치고 4월 27일 호남의 수도인 전주성에 입성해서 전주화약을 체결한다. ‘탐관오리 처단’, ‘노비문서 소각’, ‘토지 평균 분작’ 등 12개 조항의 폐정개혁을 합의하고 이를 시행하기 위해 집강소를 설치했다. 

전주를 비롯한 전라도 일대는 집강소가 설치되어 봉건적 잔재를 청산하고 있었지만, 유일하게 집강소가 설치되지 않은 곳이 전라남도의 중심이었던 나주였다. 민종렬 목사를 중심으로 농민을 수탈했던 아전들과 군인들이 수성군을 결성하여 나주읍성을 굳건히 지켜내고 있었다. 전봉준과 동학농민군은 나주를 방치할 수 없었다. 7월 5일 광주의 최경선과 나주의 오권선이 이끄는 연합부대가 나주읍성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물러나 대치하고 있었다. 8월 13일, 전봉준이 비무장으로 나주읍성을 찾아 민종렬과 담판을 벌인 사건은 스스로 목숨을 건 모험이었다. 민종렬은 전봉준의 인간됨을 알아본 것이고 전봉준은 민종렬의 인격을 신뢰했다. 더구나 담판 후에 수하 십여 명과 객사에서 잠을 자고 나온 것은 비록 협상은 결렬되었지만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신뢰의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 7월 5일 나주 서성문전투를 시작으로 11월 말까지 나주 일대에서 총 7차례나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으나 끝내 함락하지 못하고 오히려 전세가 역전되었다. 나주에는 호남초토영(나주초등학교)이 설치되어 동학군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이 자행된 곳이 된다. 호남의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한 본부로 변하여 680명에 달하는 동학군이 처형된 형장이 되었다. 

나주목 객사였던 금성관 앞마당에는 나주 수성군들이 동학농민군들을 물리친 내용을 기술한 금성토평비가 서 있다. 동학농민군이 폐정개혁을 부르짖은 동학군을 진압하고 학살한 나주 수성군의 무력을 자랑한 것이지만 나주를 비롯한 인근 동학농민군이 꿈꾸었던 세상을 좌절시킨 현장 중 가장 대표적인 곳이다. 

나주는 두 번에 걸쳐 전라도 비상을 꺾은 것이며 우리 민족이 단박에 웅지를 펼수 있는 기회를 없앤 배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당시 사회상을 비추어 볼 때 동학농민군의 꿈만 좌절된 게 아니라 우리 민족 스스로 하려던 개혁과 개방이 일본군에 넘어간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나주를 전라도의 배신이라고 칭한다. 

이러한 때, 중앙정부에서 광역경제권을 5극 2특으로 구성하려고 한다. 전북을 광주·전남권에 흡수시켜 구성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전북권에서 그동안 추진해온 ‘전북새만금특별자치도’ 정책도 무산되고 말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전북과 전남은 역사적으로 문화 차이가 있다. 그동안 광주·전남의 2중대로 불리어 오며 소외와 역차별을 받아왔는데, 그 정도가 더 심화될 조짐이다. 전북도민이 모두 나서 ‘전북새만금특별자치도’를 사수해야 한다.

/김현조 전북시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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