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조 전북시인협회 회장
/김현조 전북시인협회 회장

삼복더위에도 할머니는 시간 날 때마다 솜을 넣은 솜바지를 지으셨다.

사람들이 보지 않는 웃방 어둑한 상태로 솜바지를 지으셨다.

대부분 맏며느리도 보지 않게 바느질을 하였으나 어느 날에는 며느리가 보고서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했다.

겨울을 준비하는 것이라면 차라리 살구나무 아래 평상에서 시원한 바람을 쐬며 하시라고 권했다.

그때마다 할머니는 “일 없다.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니 너는 관심 두지 말라.”고 강한 어조로 잘라냈다.

음력 시월 말쯤부터는 찬 바람이 불었다.

그동안 솜을 누벼 만든 두꺼운 솜바지를 마당 끝에 자리한 변소에 살며시 걸어 두었다.

매달 한 번이나 두 번을 어김없이 변소에 걸었다.

그러면 밤사이 누군가 와서 기척없이 그 옷을 입고 간다는 것이다.

이런 일을 반복하는 할머니조차 바지를 가져가는 사람이 누군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솜바지를 누벼서 변소에 걸어두는 일은 할아버지가 시켜서 한 일이다.

할아버지는 광산업을 하였는데, 가끔 현금다발을 뭉텅이로 가져다주면서 할머니에게 은밀하게 그 돈을 넣어서 솜바지를 지으라고 하셨다.

그런 일을 육 년을 했다고 했다.

이 일은 며느리도 몰라야 하고 오로지 할머니만 알아야 하는 비밀인데, 여름부터 땀 흘리며 준비하는 할머니의 모습을 며느리가 가끔 알아챘지만 겨울을 준비하는 것으로만 이해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1943년 유월 어느 날에 사라졌다.

동네 사람들이 다 동원되어서 엉뚱한 산골짜기에서 시신을 발견했다.

사라진 지 삼 일째 되는 날에 시신으로 돌아온 할아버지는 실족사로 처리되었지만 누군가에게 살해되었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모두 짐작하였지만 사인에 대해서 나서서 밝힐 처지가 못 되었다.

그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당신 현장을 목격했던 고종사촌 형님(1937년생)이다.

어느 날 막걸리를 함께 나눠 마시며 자기의 어릴 적 기억을 내게 말해주었다.

용산구청 비서실장을 지낸 국 선생과 용산에서 술잔을 기울이다가 집안 이야기 했더니, 어쩌면 자기네 어른들과 비슷한 일을 당했느냐며 반색하였다.

국 선생은 완주군 봉동읍 출신으로 서울에서 공무원을 오랫동안 한 사람이다.

국 선생이 대표로 국가보훈처에 가서 우리 가족들도 보훈 가족이 될 수 있는지 문의하였다.

보훈처에서는 김구 선생의 친필이나 이런 사실을 증언해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국 선생은 절망했다고 한다.

선조께서 애국하신 내력을 더 찾아보거나 집안의 자랑으로 여기고자 했는데,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누고는 증인이나 증거 없이는 안 되는 일이라고 단호하게 거절했다는 것이다.

필자가 나중에 일제강점기에 조선 땅에 살면서 독립자금을 대는 일을 어떻게 증거를 남기고 증인이 있도록 알리면서 할 수 있느냐고 따져 물었더니, 현행법 기준이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엄혹한 감시와 친일자들과 스파이들을 모르는 분위기에서 독립자금을 지원한다고 소문을 내던가 증거를 남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당사자만 알아야 할 일이고, 가족조차도 알아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한 가족이 몰살당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증거를 가져오라는 처사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결국 나와 국 선생은 포기하였으나 마음으로 선조들에 대해 자랑스러움을 간직하자고 했다.

작년 여름에 전북시인협회 정읍지역위원장인 김철모 시인과 고부향교에서 진행하는 <향교활용사업>에 대해서 의논하고자 당시 고부향교 유도회장인 권 선생을 찾아갔다.

권 선생은 오랫동안 그 지역에서 공무원으로 호적 관련 일을 하였던 사람으로 기억력이 또렷하였다.

우리 집안 이야기가 나오자 금방 알아차리고 그분이 먼저 아는 척을 했다.

“당신네는 완주에서 온 사람들이고 유학자 집안이다. 내가 당신네 집안 내력은 잘 안다.”며 할머니 친정이 정읍이고 할머니 동생들 이름은 무엇무엇이라며 막힘없이 줄줄 말해주었다.

사실 할머니 형제들에 대해서는 필자도 알지 못했으며 다만 여동생 한 분과 군산에서 건장하게 사셨다는 남동생 이야기만 알고 있었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서 그분이 장황하게 설명하는 이야기를 한참을 들어야 했다.

다만 필자는 이런 사실을 더 찾아보고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며칠 전 광복 77주년 기념행사가 전국으로 진행되었고 대통령이 나서서 기념사를 하였다.

우리는 어느 날 갑자기 미국에 의해 독립이 되었지만, 당시 조선 백성들은 대부분 독립을 원하였다.

적극적인 사람들은 해외로 나가서 광복군으로 참여하며 직접 전투를 하였다.

국내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철저한 감시와 핍박과 착취를 당하였으며 이웃끼리도 수상한 행동에 대해서 신고하라고 종용받았다.

따라서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한다는 것은 아주 은밀히 진행해야 하였으며 이 또한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사진으로만 뵈었던 할아버지는 건강한 모습이었으나 어느 날 갑자기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육이오 전쟁에는 국군으로 참전했던 둘째 아들을 잃었고 비통한 세월을 보내다가, 살았던 마을을 떠나 식솔을 데리고 친정 동네로 이사하고 말았다.

국난이 오랫동안 지속되고 반복되었던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우리 국민 어느 집에나 있을 법한 사연이 필자 집안 내력이기도 하다.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일은 국난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특별한 각오가 필요한 요즘이다.

/김현조 전북시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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