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가 가진 '자유' 그리고 인간

<사탄>이 <예수>님을 세 번 시험하는데 <예수>께서 가지신 밑천은 오로지 '자유' 하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자유'란 자기 인생을 하나님의 손에 놓고 자신 인생의 근거를 역설적으로 저쪽 편에서 찾는 것입니다. 이는 인생 전체를 문제 상황으로 느끼게 합니다.

<예수>께서 맞은 첫 시험은,

<마귀>가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을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만으로 살 것이 아니오.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마태복음 4장 3절~ 4절)의 구절입니다.

神과 인간의 결정적인 차이는 '시간'입니다. 바꿔 말하면 인간의 유한성이죠. 결국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는 육신의 비천함과 공허함이 인간의 비극입니다. 땅 위에서는 가치를 의심할 필요가 전혀 없는 우상들이 분명히 있고 빵과 행복을 분배해줍니다. 허나 그 나라는 地上의 것이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닙니다. 확실한 지상과 어쩌면 찾기 위해서라면 불안과 불확실성을 견뎌야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택할 수 있는 선택권이 바로 <예수>께서 인간에게 준 '자유'라는 것이죠.

빵으로 복종을 얻어낼 수 있다면 그게 무슨 '자유'란 말인가! 인간이 무조건적으로, 끝까지 철저하게 신실함을 지키지 않는 신이라면 그게 무슨 하나님인가!라고 생각하시고 <그리스도>께서 빵을 떡으로 만드는 것을 거부하셨다고요. 그러나 <대심문관>은 인류가 빵을 먹지 못할까봐 전전긍긍하고 꼼짝없이 따르게 된다고 단언합니다. "그리하여 먼저 먹을 것을 달라, 그러고나서 善行을 요구하라"고 할 것이라고..

<악마(사탄)>가 <프로메테우스>가 하늘에서 불을 훔쳐온 것을 빗대어 빵을 신에게서 훔쳐와 너희에게 준다고, 그래서 '오직 말뿐인, 말만으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聖殿을 부수고 <그리스도>의 이름이 걸리지만 우리들(교회)의 새로운 성전을 짓는다고 말합니다. '자유'와 빵은 어느 인간에게든 양립할 수 없는 것이어서 모든 인간들은 자신의 '자유'를 교회(대심문관 무리)에게 자발적으로 갖다바친다고 단언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아니고 행복과 빵을 추구할 뿐 자기가 무엇을 믿고 실천해야 하는지 알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친숙한, 설명과 증명이 가능한 하나님을 믿고 싶어하며 불확실하고 두려운 '자유'라는 허공에 떠 있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교회(대심문관)는 이를 <그리스도>의 연민보다 더 큰 연민으로 가엾게 여겨, <그리스도>의 사랑보다 더 자상하고 이해심과 자비로운 많은 사랑도 과시한다고요. 그래서 인간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제공하고, 대신 인간은 '자유'를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누가 이런 힘든 '자유'를 누리려 하겠는가? 누가 불확실하고 불안함을 감수하고 어둠 속으로 뛰어들겠는가? 이러한 '자유 '속으로 들어서는 것, 확실하고 분명한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은 끔찍한 고통이며 부담인데 누가 견뎌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인간은 오직 '자유'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섬길 수 있으므로 '자유'의 포기는 하나님에 대한 배신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인간에게 빵을 약속하는데 인간들이 교회의 권위에 인도함을 받는 조건입니다. 교회는 확실하고 분명한 종교사회주의적이거나 부르주아적인 확실하고 분명한 목표를 제시하고, 도덕과 죄의 용서를 제시하고 인간들에게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다는 느낌과 증거를 약속합니다. 마귀(사탄)가 모습을 바꾼 교회 자체가 <그리스도>가 거부한 자리를 꿰찬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반 까라마조프>가 <대심문관>의 입을 통해 개진한, 광야에서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세 시험 중 첫 시험에 대한 견해입니다.

/박정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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