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익은 시간

조경옥

 

가을 길을 걷는다

오래 묵은 나무들 사이로

오래 묵은 웃음들이 흘러간다

덩달아 춤사위로 나풀거리며 떨어지는 가을 잎새들

훌쩍 지나간 세월이라지만

함께 엮어낸 이야기로 말할 것 같으면 

영남 알프스를 열댓 번은 더 넘었을 길이다

오래될수록 깊어지고 질겨지는 인연

그 안에 담긴 우여곡절 또한 만만치 않을 터

그래도 손 놓지 않고 이어온 그 가슴 가슴들이

신불산의 단풍보다 곱고

간월재 하늘정원 억새밭보다 넓다

바라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파래소에서 

세상 끝날 때 까지 여일하기를 기원하며

이젠 두 다리로 서기엔 힘이 부족해 지팡이를 짚고

서로에게 기대어 서서

가을 사진을 찍는다

 

가을 깊은 골에서

우리들의 잘 익은 시간이 저물고 있다

 

조경옥 시집<바늘이 지나간 자리>(도서출판 시와 신문사. 2022) 

시간이 익는다는 것은 시가 아니면 표현하기 어려운 문장이다. 자연이 계절대로 변화하는 것도 가을이면 익는다고 해도 무방하리라. 사람이 나이가 들어 활동이 적어지고 활기가 줄어든 것도 가을로 빗대면 적당할 것이다. 가을은 우리가 인식하는 만큼 성숙한 계절이기도 하고 수확과 풍성을 상징이기도 하지만 익어가는 혹은 저물어 가는 시간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가을’, 그리고 ‘시간’을 떼어 놓아도 가슴 떨리는 단어이고 함께 붙여놓으면 지팡이라도 들고 나서고 싶은 충동을 일으킨다. 가을이 가면 겨울이라는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데 앞으로만 달려가는 시간은 흔적을 지우듯 모두 쓸어간다. 시간이 지나간 자리에는 늘 활자만 남고 활자 사이에 사람이 끼어 있는 꼴이다. 장엄한 가을과 잘 익은 시간을 힘껏 안아보자.

-김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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