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적이라는 두번째 시험에 넘어가버린 교회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마태복음 4장 5절~7절)

<대심문관>이 말하길 "그러나 너는 이 권고를 물리쳤고, 술책에 빠져 밑으로 뛰어내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물론 너는 신으로서의 긍지를 지키며 훌륭히 행동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가장 무섭고 가장 근본적인 가장 괴로운 정신적 의혹의 순간에 자유로운 양심의 결정만으로 행동할 수 없게 되어 있어. 너는 자신의 이 언행이 靑史에 기록되어 이 땅 끝까지 영원히 전해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다른 사람들도 모두 너를 본받아 기적을 구하지 않고 하느님과 함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거야. 그러나 기적을 부정할 때 인간은 신까지도 함께 부정한다는 것을 너는 몰랐던 거야. 왜냐하면 인간은 신보다도 오히려 기적을 구하기 때문이지. 인간이란 기적 없이는 살 수 없는 거야. "

"너는 자유로운 신앙을 갈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원히 사람을 놀라게 할 단 한 번의 위력으로 凡人의 마음 속에 노예적인 환희를 불러일으키고 싶지 않았던 거야. 그러나 너는 인간을 너무 높이 평가했어. 왜냐하면 그들은 원래가 반역자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노예에는 틀림없기 때문이야. 잘 보고 판단해 봐라. 그때 부터 벌써 15세기나 지났으니, 네가 자기의 높이에까지 끌어올린 상대가 대체 어떤 존재들인가를 직접 관찰해 봐라. 나는 단언하거니와 인간이란 네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약하고 비열하게 만들어져 있어! 도대체 네가 한 것과 같은 일을 인간이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토록 인간을 존경했기 때문에 오히려 너의 행위는 그들에게 동정을 품지 않은 것으로 되어 버렸단 말이야. 그것은 네가 그들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야. 이것이 인간을 자기 자신보다 더욱 사랑한 너의 짓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만약에 네가 그렇게까지 그들을 존경하지 않았다면, 그들에게 그렇게까지 많은 것을 요구하지는 않았을 게다. 그리고 그쪽이 오히려 사람에 가까왔을지도 모른다. 즉 그들이 부담이 가벼워질 테니까. 인간은 원래가 무력하고 비열한 족속이야." 

"너는 물론 이들 자유의 아들, 자유로운 사랑의 아들, 너의 이름을 위하여 자발적으로 위대한 희생을 바친 아들을 자랑스럽게 가리켜 보일 수도 있을 게다. 그러나 그것은 몇천 명에 불과한, 거의 신이나 다름 없는 인간들뿐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도대체 그 나머지 인간들은 어떻게 된다는 건가? 그런 위대한 인간들이 참아내지 못했다 해서 그들을 책망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와 같은 무서운 선물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여 연약한 영혼들을 책망할 수는 없지 않느냐 말이다. 아니면 너는 선택된 자들을 위해, 선택된 자들한테 온 데 지나지 않는다는 거냐?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곧 신비에 지나지 않는 거다. 그런데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단 말이야. 그러나 그것이 정말로 신비라고 한다면, 우리도 신비를 선정하여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양심의 자유로운 결정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며 오직 신비가 있을 뿐이다. 모든 인간은 자기 양심에 거역하더라도 이 신비에 맹종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렇게 설득할 권리가 있는 셈이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는 그대로 해 왔다. 우리는 너의 사업을 수정하여, 그것을 '기적과 신비와 교권' 위에 세워 놓은 거다. 그러자 민중은 다시 자기들을 양떼처럼 이끌어 줄 사람이 생기고 끝없는 고통의 원인인 그 무서운 선물을 마침내 제거해 줄 때가 온 것을 기뻐했다. 우리가 이렇게 가르치고 이렇게 실행한 것이 옳은 일인지 아닌지 자, 어디 한 번 말해 봐! 우리가 솔직히 인간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가련히 여겨 그 무거운 짐을 덜어 주고 그들의 연약한 본성을 감안하여 우리의 허락을 얻으면 그들의 죄까지도 용서받을 수 있게 했다면, 우리도 인류를 사랑했다고 할 수 있지 않느냐 말이다! 도대체 너는 무엇 때문에 이제 우리를 방해하러 나타난 거냐? 대체 너는 왜 말 한 마디 없이 그 유순한 눈으로 내 마음 속을 들여다보듯이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거냐? 성을 내겠으면 마음대로 내 봐. 나는 너의 사랑 같은 건 원하지도 않는다. 나 역시 너를 사랑하고 있지 않으니까. 게다가 너한텐 아무 것도 숨길 필요라곤 없어! 네가 어떤 인간이라는 걸 내가 모를 줄 아니? 너는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를 다 알고 있어. 그건 네 눈을 보면 알 수 있지. 그러나 나는 너한테 우리의 비밀을 감출 생각은 없다. 하긴 너는 어쩌면 내 입을 통해서 그걸 듣고 싶어하는 지도 모르겠구나. 그렇다면 내가 들려주마. 우리의 친구는 네가 아니라 그 <악마>란 말이다-이게 우리의 비밀이다! 우리는 이미 오래 전부터 너를 버리고 그와 한패가 되었다. 벌써 8세기 전부터의 일이지. 옛날에 네가 분연히 거부한 것을, 그가 이 지상의 왕국을 가리켜 보이며 너에게 권했던 그 마지막 선물을 우리는 8세기 전에 그로부터 받았던 거다."

교회는 인간이 오로지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만을 향해 부르짖는 것밖에 할 수 없는 곳, 그 깊은 곳으로 인도하지 않고 그렇다고 하나님의 크신 권능과 진실한 사랑과 진실한 용서와 진실한 기적으로 계시하시는 저 높은 곳으로 인도하지도 않는데 이것이 종교의 거짓말이며,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대심문관>, 즉 <이반 까라마조프>는 단지 종교와 교회를 비판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의 존재를 합리화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곧 종교가 되어버리고, 종교가 곧 하나님의 존재 부정이라는 역설을 얘기합니다.

인간은 경배할 수 있는 대상을 필요로 하고, 흔들림 없는 확신, 확고한 세계관을 갖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기적을 요구하는데, 이 기적은 인간의 삶이 피안과 맺고 있는 관계를 눈으로 보고, 느끼고, 설명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러한 기적을 거부하는데, 그 이유는 인간이 여러 종교를 통해 경험하고 싶어하는 기적이 此岸의 기적일뿐 하나님이 계신 기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지 않았기에 인간은 지금도 근본적인, 힘들고, 고통스러운 의문의 순간에도 자기 마음의 자유로운 결정을 스스로 내려야 합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본질은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순전히 彼岸에 속한 것이죠. 그러니 인간이 이런 상황에서 믿음을 가지기 어렵죠.

<대심문관>, 즉 <이반 까라마조프>는 위에 인용한 것처럼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조금 바꿔 "그것을 기적과 신비와 권위라는 토대 위에 세웠다."고 했는데 교회는 인간이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만을 향해 부르짖는 것밖에 할 수 없는 곳이며, 저 높은 곳으로 인도하지 않는 것이 본질이라고 당당히 밝힙니다.

그런데 <대심문관(이반 까라마조프)>의 무신론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적이라는 두 번째 시험에 넘어가버린 교회를 공격하는 역설을 보입니다. 인생의 고통과 불안에 대한 질문에 답해주지 않는 교회에 대해 끝없이 고통과 불안을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음으로써 하나님을 확신하는 모순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박정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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