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 유일한 소설 유태인 집단지성의 창작물

神의 선택이나 섭리를 인간이 알거나 이해할 수 있는 지의 여부를 '可知 대 不可知'로 부르거나, '可解 대 不可解' 논쟁으로 부릅니다. '감히 피조물 따위가 어찌 神의 뜻을 알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감히 신성모독이 될 지 모르는 이야기 하나 지어봅니다.

거느리고 있는 제후들의 충성심이 예전 같지 않다고 느끼는 황제가 있었습니다. 조선의 의금부나 중국 명나라 때의 금의위 같은 황제 직속의 첩보 조직을 동원하여, 본보기로 가장 충성심이 강하다고 여기는 제후 <욥>을 거덜내기로 합니다. 졸지에 생때 같은 자식 열 명이 죽고, 가산은 흩어지고, 병에 걸립니다. 그러니 옆 제후들이 찾아와 위로랍시고 하는 말들이 "<욥>, 자네가 잘못했을 것이므로 황제께서 벌하신 것이다." 라거나, "자네가 숨긴 죄 때문에 고난을 받는다면서 숨김 없이 고백하라." 라거나, '자네가 순결하고 정직하면 회복시켜 주실 것이고 그 유명한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말을 해가며 염장을 질러댑니다. 하지만 <욥>은 결백하니 더욱 반발합니다. 어찌보면 이웃 제후들에게 본보기로 군기 잡는 일인데 말이죠.

결국 황제가 출두하여 <욥>과 대면하자, <욥>은 자신의 충심은 변함이 없음을 밝히고 억울함에 몸을 떨지만 황제는 그저 침묵할 뿐입니다. 

그러더니 입을 여는데 동문서답 식으로 "(황제 자신이) 다스리는 세상에는 너 따위는 짐작도 못할 숱한 괴물들이 있고 그것들을 모두 자유롭게 내가 부리는 것을 아느냐?" 묻습니다. 그러자 그 큰 권능 앞에 <욥>이 항복합니다. 황제에겐 힘이 있으니까요.

神을 황제로 바꾸는 불경을 저질러 봤습니다. 그랬더니 더 납득이 가시지 않나요! <욥>의 항복이 현세의 우리에겐 전혀 심정적으로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굴복을 不可解라 하지요. 아무리 충심으로 잘 섬겨도 자신은 주체가 되지 않는 내기의 대상으로 전락시킵니다. 그 한 번에 밑바닥으로 떨어졌는데요. 아무리 피조물이라지만 위로나 변변한 변명도 한마디 없이 神께서 "내가 힘 있어서 그랬다. 까불래?" 라고 하시는데 속마음까지의 완전히 승복이 가능하십니까? 그런데 힘을 가진 이가 神이 아닌 그저 권력을 지키려 전전긍긍하는 사람이라면 납득이 갑니다. '욥기'의 하나님은 제 견해로는 철학적으로 무오류가 아닌 갖은 오류의 하나님에 머물러 있습니다. 게다가 소설이니 저자들이 2,500년 이전의 시각에 머물러 있어서죠.

구약의 하나님은 무섭고 섬칫한 결정을 많이 내립니다. '신명기', '여호수아' 등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른 부족에게 무조건 항복하라고 협박하고는 무작정 쳐들어가서, 노인과 어린이까지 남김없이 죽이는 일도 뻔뻔하게, 그리고 자랑스럽게 적혀 있습니다. 때문에 저는 '욥기'까지 유태 중심의 세계관에 머물러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욥기'는 성경 속 유일한 소설입니다. 창작자는 알려지지 않았고 유태인 집단 지성의 창작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일리아스', '오딧세이'처럼 집단 창작으로 보이는데 주로 사제 계급이 창작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성경에서 최초로 '사탄'이 등장하는데 '악마 사탄' 또한 神의 또다른 피조물로서, 정해진 그러나 추잡하고 꺼려지고 궂은 행위를 하는 임무를 띠고 있습니다. 비밀첩보요원처럼요. 

창작시기는 여러 논란이 있지만 <카렌 암스트롱> 누님을 신뢰하는 저로서는 '바빌론유수' 이전이 아닐까 추정합니다. 그녀가 쓴 '축의 시대'에서 '바빌론유수' 이후 미래의 기독교가 태어날 철학적 변화가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어찌보면 '욥기'의 하나님은 전형적인 유태인들만을 위한 구약의 하나님이라 봅니다. 그런데 '축의 시대'에 이런 어찌보면 구린 내용을 만들 정신이 있었겠습니까!

'욥기'에 등장한 <사탄>으로 해서 '惡의 존재가 과연 神의 뜻인가.'로 수많은 갈등이 있었습니다. 여기서는 생략합니다만 관심이 있으시면 '神正論' 등을 검색해보십시오.

<구티에레즈> 신부는 라틴 아메리카 해방신학의 논리를 대표하는 사제입니다. 해방신학은 고통받는, 선량한, 충심으로 하나님을 믿으나 삶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라틴아메리카 하층민들을 보다 못한 사제들이 벌인 저항 운동입니다. 

 앙상 레짐,  부르조아지 등등에 의한 억압적 통치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논리들이 성경에 있습니다. 바로 <욥>의 고통의 이유가 인간이 감히 짐작도 못하는 신의 깊은 뜻이라고 보는 것도 포함됩니다. 개신교의 <마르틴 루터> 역시 '예정론'으로 모든 운명은 정해져 있다고 주장하며 신분 고착화에 일조했습니다. 물론 당시의 <루터>는 귀족들의 후원이 필요하긴 했습니다. 게다가 시대가 프랑스대혁명 이전이니 신분의 차이에 순종하라고 했어야 했겠죠.

  

좌파 사제랄까, 보수적 시각에 반발하여 낮은 사람들에게 임해야 한다고 부르짖으며 사제의 신분으로 총까지 든 사제들의 논리. 즉 대표해야 하는 사제의 '욥기' 해석은 얼마나 특출난지 궁금했습니다. 물론 제가 어디까지나 인간의 시각에서 '욥기'가 문제가 있다고 보고 있어서입니다.

결론은 신학 자체는 기존의 카톨릭 주류 해석과 거의 차이가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그가 신앙하는 종교를 훼손하지 않으려 노력하더군요. 기대했던 좌파적 시각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역시 神의 뜻에 대해 不可解를 주장했습니다. 당연하지만 출판한 '카톨릭 분도출판사'에서 유별난, 숱한 쟁점을 만들 일을 당연히 하지 않았겠죠. 결국 교리에서는 해방신학도 차이가 없었습니다. 다만 <욥>처럼 시련을 당하고 있는, 현세의 무죄하지만 고통받는 대상들에 대한 끝없는 사랑이 피력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설픈 동정심이 아니라 神의 대리자로서의 의무감과 충심이 잔잔하게, 그러나 가득 들어있었습니다. 

'욥기'를 이미 읽어보신 분께 추천합니다. 그나마 나은...

/박정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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