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구 칼럼니스트
/이춘구 칼럼니스트

주민자치의 이념은 오래된 풀뿌리 민주주의(grass-roots democracy)에 근거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지방자치분권 및 지방행정체제개편에 관한 특별법, 약칭 지방분권법」에 의거해 읍·면·동에 ‘주민자치회’를 구성하고 풀뿌리 민주주의의 실현을 도모하고 있다. 그러나 ‘주민자치회’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국민이 존재 자체를 잘 모르거나 그 기능에 대해 회의를 갖고 있다. 읍·면·동 ‘주민자치회’는 권위주의 행정의 산물일 뿐 아니라 실질적으로 주민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또한 「지방분권법」뿐 아니라 「지방자치법」도 과거 권위주의적 오류를 안고 있다. 2021년 1월에 발의된 「주민자치기본법(안)」도 비슷한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읍·면·동 ‘주민자치회’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 필요하다.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의 통제를 받으며, 주민 스스로의 의사결정이나 주민의 복지를 추구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부지불식간에 형성된 일제 강점기 권위주의 행정의 잔재를 떨치고 우리 역사문화의 DNA를 살리는 주민자치의 모색이 필요하다. 

  주민자치의 이념은 궁극적으로 홍익인간 재세이화이다, 즉 인간세계를 널리 이롭게 하고 만물을 교화시켜서 이성적 존재, 신인(Homo Deus, Demigod)의 경지에 오르게 하는 것이 주민자치의 이념이다. 고조선의 개국기사는 홍익인간 재세이화를 실현하는 신인과 국인의 계약을 보여준다. 고대도시국가의 수립은 나라 백성이 신과 같은 능력을 가진 신인(神人)을 임금으로 세우고 각자 생업에 종사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고 있다. 국가 수립 주체는 임금과 백성이며, 수혜 내용은 우순풍조(雨順風調)하고 인간사에 몰두하는 것이다. 이는 주민자치의 주체와 수혜내용과 매우 일치한다. 주민자치의 주체는 주민이며 수혜내용은 민주적 참여와 의사결정, 경제복지, 문화교육이다.    

  풀뿌리 민주주의를 제대로 실현하고 주민자치를 실행하려면 주민이 많은 읍·면·동 단위가 아니라 주민의 연대가 강한 통·리 단위로 ‘주민자치회’가 구성돼야 한다. 역사적으로는 촌계와 두레, 향약 등의 전통이 그 원류이다. 촌계는 경제공동체, 두레는 노동공동체 성격이 뚜렷하며, 향약은 이에 덧붙여 생활공동체, 사신(제사)공동체 성격이 종합되고 있다. 향약은 또한 경제복지, 문화교육 공동체로서 오늘날 통·리 단위 즉 마을공동체의 자치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다. 법문화 또한 향약으로 이어진 주민자치의 강행성을 바탕으로 향약은 자치법, 행정법, 조직법, 경제법, 노동법  등으로서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는 향약을 새롭게 계승해 마을공동체에서 풀뿌리 민주주의, 주민자치 실현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중앙대학교 명예교수인 박경하 향약연구원장은 남원시 금지면 입암리에서 실시되는 입암향약은 이 같은 점에서 주민자치의 원형으로 규정한다. 2025년이면 시행 300년을 맞게 되는 입암향약은 170여 세대가 공동재산을 기초로 하는 향약이다. 입암향약은 사회 변화에 맞춰 상하합계 형태로 이루어졌으며, 오늘날 입암새마을회로 명칭을 바꾸어 운영되고 있다. 마을공동체의 주요 현안에 대해서 약원들의 총회로 의결하고, 집행한다. 모든 세대가 참여하고 의사결정도 민주적으로 이루어진다. 입암향약은 덕업상권, 예속상교, 과실상규, 환난상휼 등 향약의 4대 덕목을 현대적으로 실천하는 방안도 마을게시판에 표기하고 있다. 

  입암향약은 딸기, 포도, 배추 등 작목을 생산해서 공동으로 출하하고 있다. 그만큼 연대감이 강해서 경제복지, 문화교육 공동체로서 역할이 기대되고 있다. 실제로 입암향약의 운영 전반을 진단하고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방안을 제시하는 게 절실한 과제가 되고 있다. 여기에다 연금복지공동체 구축을 위해 익산시 성당포구 마을 등이 시행하고 있는 마을자치연금과 같은 공동체연금을 도입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공동체연금이 도입된다면 입암향약의 지속가능성은 더욱 더 공고해질 것이다. 

  박경하 원장은 주민자치의 원형으로서 입암향약을 널리 보급하려면, 향약의 보고인 남원에 ‘향약박물관’을 건립하면 좋겠다고 제안한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향약 자료를 수집, 보존, 전시하며, 향약을 통한 주민자치 정신을 선양하는 교육을 추진할 수 있다는 점 등에서 시급한 검토가 필요하다. 이 같은 과업을 수행하려면 열정적인 향약향도, 문화향도의 육성이 전제돼야 한다. 주민자치의 원형으로서 입암향약은 ‘주민자치회’의 완전한 대체재로서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지방분권법」 등 관련 법률의 정비가 시급한 이유이다.  

/이춘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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