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종의 충신 이완용, 실정과 탐욕

 

50대 이상 분들은 三綱五倫을 쓰지는 못해도 대충 외우고 계실 겁니다. <박정희>정권 때까지는 시험에 많이 나왔죠. 그런데 사서삼경을 읽으니 어디에도 그런 내용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성리학을 채택한 조선 왕조에서 원활한 통치를 위해 정책적으로 만들었다고 봅니다. 대통령이 곧 왕 비스무리하게 여겨졌던 3공화국까지는 위정자들이 통치자의 환심을 사고자 열심이었고, 시대착오적인 수직적 사고의 이데올로기를 강요했습니다. 독재에 희생 당했었습니다.

얼마 전 국민의힘 <정진석> 부의장이 망언을 했습니다. 내용은 다 아실테고 친일파 보수의 집결을 노린 일종의 고육책이 아니었을까 여겨집니다. 지지층들이 거의 매국노의 후손들이나 꼰대들로 여겨질 수 있는 위험을 무릅썼으니 다급한가 봅니다.

 

<한스 울리히벨러>라는 진보 역사학자가 [허구의 민족주의]라는 저서를 집필했습니다. 명저라는데 다분히 유럽의 기준에서의 평가입니다. 유럽은 고만고만한 국가들이 별다른 국경도 없이 존립하고, 다툼 끝에 왕이나 영주가 자주 바뀔뿐 경제 활동을 하는 장소는 변하지 않아 지배자에 대한 충성심이나 민족 개념 등이 없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17세기 30년 전쟁 후 많은 제후국으로 독일이 갈가리 찢깁니다. 프로이센이 보불전쟁에서 승리하고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제 2제국을 선언합니다. 이때 강한 국수주의와 민족주의가 등장하게되고 이전까지의 유럽과 다른 양상이 전개되었다는 것입니다. 유럽만으로는 맞는 얘기입니다.

그렇지만 동북아의 사정은 판이합니다. 일본이야 바다가 곧 국경이었고 삼면이 바다였던 우리 역시 획정된 국경에서 강한 애국주의 경향이 있습니다. 즉 나라를 뺐기는 것은 유럽과 달리 노예 상태로 전락한다는 얘기와 동일합니다. 물론 당시의 일본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서구의 성문 헌법을 받아들인 국가이긴 했습니다.

 

<고종 이명복>보다 <이완용>은 6살 어립니다. 임오군란때 당연히 죽었어야 마땅했던 <민비 민자영>이 조선의 입장에선 정말 불행하게도 살아 돌아와, 그를 축하하느라 열린 과거에 급제해서 벼슬길에 오릅니다. 실력도 빼어났지만 태어난 집안이 찢어지게 가난해서 양자로 들어간 집안이 원래 조선의 큰 부자이자 권세가였기 때문인지 <고종>의 주목을 받았다 합니다. 봉건 왕조 용어로 총애을 받아 고속승진했다 합니다. 불과 서른에 주미공사관 참찬관으로 나가 두루 견문과 언어를 배웁니다.

그만큼 <고종>의 옆에서 그의 온갖 실정과 탐욕을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이미 <흥선대원군>이 수십 년동안 조선을 좀먹던 세도정치를 끝장내고 왕권이 강화된 시절이었지만 <고종부부>는 <민비> 일족을 등용하는 척족정치를 펼치고 나라를 막장으로 몰고갑니다. 동학농민운동 때 모든 대신들이 외세의 개입을 반대했으나 <고종부부>는 청나라에 몰래 도움을 요청하고 이후는 아시는대로 입니다. 그러나 <고종>에게는 진정한 충신이었던 <이완용>은 '민비 시해사건' 이후 1896년 '아관파천'을 성공시켜 고종의 목숨도 구하여 더욱 신임을 얻습니다. 물론 정부 특히 <고종>의 돈이 좀 들어갔지만 독립협회도 세우고, 독립신문을 발간하며, 영은문 자리에 사재까지 넣어가며 독립문도 세웁니다. 독립신문 주필로서 왕성한 활동도 벌입니다. 당시에는 그가 자주를 부르짖었습니다

/박정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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