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일 매국의 역사 그 중심에 있는 이완용

  러일전쟁 이후에 을사조약을 체결하는데 정부 측, 즉 <고종>이 가장 믿을 만한 인물로 협상에 나서지만 대표로 <고종>이 먹을 욕들을 뒤집어쓰며 매국노 대접을 받습니다. 비굴하게 뒤로 숨고 모든 책임을 <이완용> 등에게 뒤집어 씌우고 이를 잘 아는 백성들마저 왕대신 그들에게 화풀이합니다. 대통령이 잘 못하면 총리 물러나게 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1909년에 <이재명> 의사의 칼을 맞아 부상당하고 총리대신을 사임하나 1910년에 전권을 가지고 한일합병조약에 나서서 그해 8월 22일에 조인합니다. 한일병합을 <고종>이 결심한 이유는 더이상 인사권이 없어서 매관매직이 불가능한 것이 가장 주요한 원인이었습니다. 울분이 치솟죠. 당시 가장 큰 협상조건은 왕가로서 계속 대접하고, 이씨왕가에 당시 돈 17만 원(요즘 시세로 30억원 정도)를 매년 보장해주는 것이 쟁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고종 이명복>이라는 희대의 暗君을 충심으로 보필함과 동시에, 그의 판단으로 당시의 조선이 갈 수 있는 최선의 합리적인 길을 모색한 것입니다.

  <이완용> 자신이 거부였기에 일본이 준 포상금 따위에는 조금의 관심도 없었고, 그것을 너무도 잘 아는 <이명복>에겐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협상자였습니다. 그리고 한일병합조약 또한 뒷전으로 빠져서 모든 똥물을 <이완용>에게 뒤집어 씌웠습니다. 그리고는 언제든 복귀할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을 남겨놓고 좋아하던 당구치며 남은 일생을 보냅니다. 그럼에도 <이완용>은 성리학적 신하관 또는 삼강오륜에 의거 <고종 이명복>에게 변함없는 충성을 다한 이유로 <고종>의 장례식도 <순종>의 의뢰로 모두 주관합니다.

   3 .1 운동에 대해 그는 매우 안타까워 했다는데 <고종>의 죽음이 촉발하였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국력이 상대도 안되었지만 백성들이 혹시나 나라를 대차게 말아먹은 이씨 왕조로 회귀하고자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봤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공화국을 표방했습니다.

  부귀영화를 누렸다지만 본인 재산으로 누린 것이지 나라 팔아먹은 공로로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송병준> 같은 말종 종자와는 다른 결이어서 어찌보면 매우 억울합니다. 솔직히 이씨 왕조가 자신들의 면피를 위해 그들에게만은 만고의 충신에게 모두 뒤집어 씌우고 숨은 것이죠. 비열한 종자들입니다. 그는 명석하고 무섭도록 합리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고종>에게 변절하지 않았으니 매국노 취급은 정말 억울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될 줄을 몰랐을까요? 진실을 알게되니 진정으로 그에게 돌을 던지기 힘듭니다.

 

 그렇다면 <이완용>은 아무 죄가 없는 가의 문제입니다. 당시의 사고로는 나라는 임금의 것이라고 보는 봉건 사고가 있었겠지만, 합병이 국민투표로 결정된 것이 아니고 밀실에서 거의 대다수의 국민을 부라쿠민(部落民)으로 전락시킨 것입니다. 고작 한 해 30억원 <이명복> 식솔들에게 생활비 얻어준 것이죠. 국사책에서 누락시킨 진실이지만 1896년 경에 전국 여러 곳에서 벌어진 왕조 타파 시도에 동의한 적도 없었고, 을사조약 이전에 인사권을 왕이 쥐고 있을 때까지 <이명복>이 벌인 매관매직에 단 한 번의 충언도 올린 적이 없었습니다. 즉 가문을 지키는 일에 전념하느라 위험하지만 옳은 일은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더러운 일에 한번도 거부하지 않았으니 역사에 이름을 더럽힌 것이죠. 물론 그 말고도 누군가가 했을 겁니다. 그러나 지도자가 바람 부는 대로, 물 흐르는 대로 사는 것은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아무리 합리적이어도 삶에는 명분이 있는 법입니다. 그 명분을 잃었다면 구차한 변명은 하지 않고 쥐죽어 지내는 것이 옳습니다. 친일파들의 자손들이 시세등등한데 친일 행각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다만 득이 되었겠죠. 경제인들야 어쩔 수 없었겠지만 정치인들이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조상을 두둔하는 것은 부귀영화를 꾀하지 않은 다수의 양심적 국민들에게 조롱받는 일입니다. 백성들을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트린 일이잖아요. 

/박정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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