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정일 '조선의 천재들이 벌인 참혹한 전쟁

임진왜란 직전 정여립 역모사건
16세기 젊은 천재들 목숨 앗아가

동인과 서인을 막론하고 뛰어난 천재로 평가했던 정여립, 서인 측의 송익필, 알성 급제를 했던 이발 그리고 정철.

그들은 당파나 서로 간의 입장 차이가 너무 커서 공존하기 힘들었다.

결국 그러한 시대 상황이 피의 역사인 기축옥사를 불러오게 만든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기축옥사는 16세기 조선 천재들이 벌인 참혹한 전쟁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당쟁은 기축옥사 이전부터 시작되었지만 선비들이 서로를 죽이는 지경은 아니었다.

그러나 기축옥사부터는 선비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당쟁으로 비화되었다.

선비들만 피해를 입은 것이 아니었다.

임진왜란 당시 승병을 모집해 혁혁한 전과를 거둔 서산대사 휴정과 사명당 유정마저도 모진 국문을 받은 후에 살아남았다.

기축옥사를 계기로 동인과 서인에서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었다.

그리고 기축옥사의 진실이 제대로 밝혀지고 마무리되기도 전에 미증유의 국난인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문화사학자 신정일은 1980년대 중반 ‘황토현문화연구소’를 설립하여 동학과 동학농민혁명을 재조명하기 위한 여러 사업을 펼쳤다.

1989년부터 문화유산답사 프로그램을 만들어 현재까지 ‘길 위의 인문학’을 진행하고 있다.

신정일 선생이 처음으로 시작한 일들이 많다.

정여립을 연구하면서 자연스럽게 대동사상에 대해 연구하고 동학을 발로 찾아다니며 연구했다.

오늘날 대학교에서 열리는 ‘대동제’라는 말도 처음 사용하고 퍼트린 사람도 신정일 선생이다.

그는 정여립과 기축옥사에 대한 연구를 수십년동안 천착하면서 조선의 역사를 역으로 재조명하는 일을 계속해오고 있다.

역사를 모른다.

모순된 말이긴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

하물며 이미 지나간 역사, 그 당시도 해석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해석이 불분명한 역사들을 후세의 사람들이 해석하고자 한다고 해서 그 비밀이 풀릴 것인가? 아니다.

세상 사람들은 말이 많은데, 역사는 입을 봉한 채 아무런 말이 없는 경우가 이 세상에는 무수히 많다.

그중에서도 가장 이해되지도 않고, 이해할 수도 역사, 가장 드라마틱하면서도 사람들에게 풀리지 않는 의문점으로 남아 있는 역사가 1589년에 일어난 기축옥사일 것이다.

당시 조선은 어떠했는가? 그렇게 수많은 천재가 나타났던 시대에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당쟁과 임진왜란 그리고 병자호란이라는 국난을 맞아 천재들이 제 역할을 할 수가 없던 시기였다.

16세기 조선에서는 수많은 천재들이 활동했다.

이 시기는 우리 역사에 새로운 기운을 일으켜 기회가 될 수도 있었지만 절체절명의 위기이기도 했다.

임금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했고, 갈래 갈래 나뉜 선비들 역시 자신들이 속한 당파를 위해 죽음을 불사한 전쟁을 벌였다.

사화인지 역모 사건인지 불분명한 기축옥사와 임진왜란 때문에 백성들은 전대미문의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문화사학자 신정일 선생은 기축옥사에 얽힌 음모와 정여립과 그 모반사건에 개입되어 죽어간 천 여 명의 선비들의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정여립은 16세기 서로 다른 정치적 견해를 두고 싸우던 틈바구니 속에 천하공물설과 하사비군론 등을 주창한 혁신적인 사상가였지만, 또 다른 일각에서는 《정감록》의 참설을 퍼뜨려 왕조를 전복시키려 한 반역가라는 극단의 평을 들어야 했다.

또한, 기축옥사로 조선 선비 1000명이 죽은 후 3년 만에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평양성을 비우고 철수하던 병조판서 황정욱은 조선이 왜 허무하게 무너져야 하는지 한탄하며 “기축옥사 때 정언신만 살았어도 이렇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절규할 만큼 기축옥사는 많은 젊은 천재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조석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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