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all me, ishmael!"

작고한 만화가 <고우영> 화백이 그린 [가루지기]라는 만화가 있습니다. [변강쇠傳]을 재해석했는데 매우 재미있습니다. 도화살를 타고난 <옹녀> 그림도 뇌살적이었습니다. 풍만한 젖무덤, 잘록한 허리, 붉게 표현된 입술 등등은 대단했습니다.  <고우영>님과 <방학기>님이 그린 한복 입은 여인은 관능미의 끝판왕들입니다. 노출이 거의 없는데도 정말 요염합니다^^.

하지만 압권은 역시 <변강쇠>입니다. 머리부터 다리까지 일직선이었는데 앙징맞은 초립을 쓴 걸 빼고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말 그대로 우뚝 선 남자 성기와 똑 닮았습니다. 손발은 작아서 있으나마나 하고, 입에는 어울리지 않게 국화로 추정되는 꽃 한송이를 앙증맞게 물고 다녔습니다. 코딱지만한 초립은 남자 성기의 끝을 연상하게 할까봐 신중했던 모양입니다. <변강쇠>의 외모는 향유 고래에서 힌트를 얻었는지, 발기된 남근에서 얻었는지는 모르나 어쨌든 둘의 모양이 너무 유사합니다.

[모비 딕(moby dick)]의 뜻은 '커다란 거시기'라는 뜻입니다. 거시기는 뭐.... '큰 고래'라는 뜻이 절대 아니지만 한국 기성세대 분들이 점잖게 제목을 붙이자니 [白鯨]이 되었습니다. 19세기 미국 포경선원들의 눈에 향유고래가 그렇게 보였을 것 같습니다. 이제부터는 [모비 딕]으로 불러야 맞죠.

 "Call me, ishmael! - 나를 이스마일이라 부르라!"

 영어로 쓰인 소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서문일 겁니다. 주인공의 사자후랄까요. 반항 또는 당당한 자아에 대한 자신감으로 읽혔었습니다. 물론 반항하는 대상이 누구인지가 쟁점입니다만.

<이스마일>은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와의 사이에 자손이 태어나지 않자, <사라>의 양해로 몸종 <하갈>을 첩으로 들이고 얻은 아들입니다. 믿기지는 않지만 '꼬꼬 할머니'가 된 <사라>가 임신하여 <이삭>을 낳은 후, 어머니 <하갈>과 함께 광야로 쫓겨났으나 나중에 아랍인의 조상이 되는 인물입니다. 이런 창세기의 신화를 아랍인들이 공유하는 것을 보면, 자신들이 유대인의 조상인 <이삭>의 배다른 형님의 후손이라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성인이 되어서 깨닫고 보니 할머니를 임신 시킬 수 있는 <아브라함>의 넘치는 밤의 힘도 또한 놀랍습니다. 아무튼 광야로 쫓겨난 <하갈> 모자가 겪었을 굶주림, 야생동물들에 노출된 공포가 얼마나 심했을까 상상해보면 별다른 죄도 없이 모자를 내친 <아브라함> 부부의 처사는 결코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적통을 잇는 것으로 정당화하였겠지만 현대의 눈으로는 비정하죠. <아브라함>보다는 아마 <사라>의 입김이 작동했겠죠. 어쨌든 모자는 살아남았던 모양입니다.

이런 <이스마일>이라 부르라는 것은 기존의 질서에 대한 반역이나 반동을 꿈꾼다는 선언입니다. 기성 정치, 종교, 경제 등등의 질서에 대한 반항한다고 선언하는 문구입니다.

하지만 완독한 후에는 의외로 별 존재감이 없이 찌질한 느낌마저 드는 話者 주인공의 모습에 헷갈렸습니다. 지리멸렬한 모습의 주인공이랄까요. 물론 애초에는 話者를 중심으로 끌어가려 했던 것처럼 보이기는 합니다. <퀴퀘그>와의 만남이 그것인데요. 그들의 관계가 제가 보기엔 브로맨스로 보이는데 동성애 코드로 보기도 한다는군요. 서구 문화권에서는 그렇게 여길 수도 있겠으나 둘의 진정한 관계를 규명하는 것이 내용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으니 넘어가도 될 듯 합니다. 하지만 야만인 <퀴퀘그>와의 우정이, 야만인을 정복한다는 제국주의 시대 백인들의 자기 합리화에 대한 반발이라니 소설이 쓰인 19세기에는 나름 의미 부여가 되었나 봅니다.

하지만 진정한 주인공 <에이허브>를, 열왕기에서 선지자 <엘리야>와 대립했던 <아합>왕의 영문식 이름이 <에이허브>인데, 관찰하는 話者로 역할을 전환합니다. <에이허브>의 <모비 딕>에의 집착을 지켜 봄에 있어 단순한 記述者의 입장에 서는 주인공이 서문에 그토록 당당한 자기선언을 한 것은 일관성 부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누구를 중심으로 끌어갈지 처음에는 혼돈에 빠졌던 것같습니다. 

/박정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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