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 민족의 전쟁의 神

구약성서에서 <에이허브(아합)>이라는 인물은 논란이 많은 인물입니다. 살아있는 상태로 승천했다는 전설의 선지자 <엘리야>와 원수처럼 대립한 북이스라엘 왕국의 왕입니다. 수도였던 사마리아에서 22년간 통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왕가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었고 아버지가 혼란을 평정하고 왕위에 올랐지만 왕권은 불안했던 모양입니다. 왕정 시대에는 군사력이 왕권 유지에 필수여서 옆나라 공주 <이세벨>과 정략결혼하는데 그녀가 바알신을 숭배했습니다. 선지자들이 웬만하면 봐주는데 그녀가 궁전 내에서 대놓고 바알신을 숭배한 모양입니다. <아합> 입장에선 주변에 강력한 '아시리아 왕국'이 있어 처가의 군사력 신세를 져야해서 <이세벨>에게 알아서 길 수 밖에 없었고, 당연히 선지자들에게 예뻐 보일 리가 없었죠. 아뭏든 엘리야와 대결도 해서 참패도 기록하지만 종교를 탄압하지 않고 자유롭게 서로의 종교를 용인해준 편이었습니다. 카톨릭이든 개신교든 기독교 일색의 세계에서는 종교나 사상의 자유를 용납한 그의 이름이 이단아로 몰렸을 겁니다. 그런 그를 실질적 주인공으로 설정한 <멜빌>의 의도는 무신론 또는 초인주의 소설을 쓰고 싶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첫 장소 설정은 무신론의 세기라고 볼 수 있는 19세기에, 한국에서는 勢가 약해 존재감이 없지만 많은 개신교 종파 중에서 퀘이커교도들의 집단 거주지에서 시작합니다. 퀘이커교는 우리로 따지면 개신교 순복음 계열처럼 열성적 예배를 한답니다. 그곳에서 제 느낌으론 불합리하다고 여기는 神을 상징한 것으로 짐작되는 '거대한 거시기', <모비 딕>만를 잡으려하는 포경선이 있고 선장 이름이 <아합(에이허브)>입니다.

사실 두 번을 읽었습니다. 20대 때 첫 독서에서는 제 지적 수준이 낮아 의미를 알 수 없었고, 지루한데다, 재미도 별로였습니다. <그레고리 펙>이 주연한 영화를 보고 더욱 헷갈렸습니다. 대체 왜 썼는지 모르겠고 어딜 봐서 명작으로 평가받는지 이해하지 못했었습니다.

기독교 신앙과 무신론 등에 대한 제 나름의 철학적 정리가 어느 정도 끝난 시점이 되었는지 다시 읽은 이 책의 의미가 <모비 딕>이 神의 은유임을 겨우 알게 되었습니다. 신의 대리인이던 선지자 <엘리야>의 대척점에 있던 <아합(에이허브)>를 통해 신에 대한 도전을 의미함을 깨달았습니다. 물론 기록을 위해 유일하게 살아남은 話者 주인공을 뺀 모두가 죽지만, 이는 인간 생명의 유한성이나 한계로 제겐 읽혔습니다.

<퀴퀘그>가 열병에 걸려서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살아난 부분에서 그가 보이는 독특한 생사관을 작가가 구태여 적은 이유는, 물론 <퀴퀘그>를 위해 준비한 관에 매달려 주인공만 살아나는 것에 대한 장치도 하나겠지만 또한 <멜빌>에게 감동을 준 것으로 보이는 기독교적 생사관에 비교한 이교도의 납득할만하고 자연주의 생사관을 일부러 삽입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시도때도 없이 등장하는 향유고래에 대한 설명을 곱씹으면 고래에 대한 글이 아니라 저 먼 미지의 대상을 향한 분석으로 이해되었습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블레이드 러너]처럼 삶에 대한 많은 사색을 부릅니다.

무신론에 대한, 실존에 대한 종교적 사유로 읽을 때에야 재미있습니다. <모비 딕>은 다만 구약의 신, 즉 유대 민족의 전쟁의 神입니다. 그런 오류가 많은 神이기에 미소한 인간이지만 <에이허브>가 반발하는 것입니다. 불신앙을 탓할 때 개신교의 목자들이 벌이 내릴 것이라 말하는 그런 무서운 神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보듬어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오류가 있는 존재여야 반발이 정당화되고 재미있는 법이죠.

그렇게 보셔야 <모비 딕>을 찾아 망망대해를 헤매는 과정이 유장한 호흡으로 읽혀집니다.

/박정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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