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조 전북시인협회 회장
/김현조 전북시인협회 회장

▲ 아 정여립

역사 인물을 무용으로 표현한다고?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하고 의심부터 하였다. 3년 전 처음 만나서 계획을 들었을 때 가진 의문이었다. 그때 황미숙 단장은 당연하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고. 

신분을 고립이라고 해석한다.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였다. 인간의 본성과 도덕을 가르치고 그 안에서 죽고 살리고 공격하고 대립하고 자기만의 리그를 메이저급으로 확장하면서 백성을 핍박한 나라였다. 그것이 성리학의 표리부동함이다. 80%의 양민인 백성은 성리학을 모른다. 20%도 안 되는 성리학자들이 자기들끼리 도덕과 규범을 만들어 놓고 성을 쌓았다. 두텁고 튼튼한 성곽을 둘러치고 그 안에서 누리면서 살았다. 왕은 가장 높고 깊은 구중궁궐 안에서 나오지 못했다. 그에겐 막대한 권력이 있었지만 고립되어 세상 구경을 하지 못하고 큰소리치며 살았다. 현대 정치판도 별반 다르지 않다. 큰소리치고 힘을 과시하지만 고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떳떳함이란 대낮에도 빛나야 한다. 

여립은 성리학의 대가였다. 그에게 학문은 중국에서 일어난 성리학이 아닌 백성에게 이로운 것으로 백성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었다. 대동계를 조직하고 반상을 구분하지 않고 어울렸던 것은 사상을 실체화하는 일이다. 백성들의 삶 속에서 스스로 일반인이 되는 일이었다. 인보 정여립은 전북에서 태어나 전북에서 사상을 펼치다가 전북에서 비운을 맞이하였지만 당시대의 희망이었다. 전라도 인심은 정도령을 기다리며 미륵불이 세상에 출현하는 것이었다. 

전라도 땅은 과거부터 언제나 미래로 향해 있었다. 굳건하고 단단한 신분제에 절망하면서 헐어버리고 싶었다. 그의 외침은 공화주의였고 그의 실천은 백성이 근간이 되어 국가를 강하게하는 일이었다. 그가 원하는 삶의 길이는 다 채우지 못했지만 그의 소망은 이어져 실학사상이 생겨났고 서학에 맞선 자주적인 동학이 일어나서 신분을 타파하고 여성을 해방하라고 민주주의 근간을 마련하였다. 400년의 근간을 언어가 아닌 동작으로 발현한다니 어찌 신비롭지 않은가. 

 

▲ 감동과 현실

삶과 사상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않으면 결코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무용은 직접적인 언어가 아닌 동작으로 전달하는 언어이기 때문에 효과라는 부수적 장치가 필요하다. 무대가 열림과 동시에 익숙하지 않은 웅장한 소리가 시각적 무대보다 먼저 몰입하게 했다. 공연이 끝날 때까지 음악적 효과는 공연을 관람하는데 궁금하게 하였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막 안내를 음악이 하는 것 같았다. 디지털의 발달은 다양한 분야에서 혁신적으로 새롭게 하고 있다. 무용 무대에서 디지털로 형상화한 무대배경은 시선을 끌어모아 집중시켰다. 사실적인 무대배경이 갖는 효과는 영화관 역할을 하는데 충분하였다. 

무용이 인물을 표현한다는 것은 재현이 아니라 창조이고 해석과 번역이 동시에 필요하다. 주인공에 대한 깊은 이해와 연구가 조화롭지 않으면 결코 성공할 수 없는 일이다. 스케일이 크면 디테일을 놓치는 경우가 있는데, 둘 다 완벽하였다는 것은 기획과 연출, 출연자 모두가 노력한 흔적이고 숙련도와 고민이 치열했다는 증거이리라.

처음부터 끝까지 전율하며 짜릿함속에서 관람하였다. 공연 관람 후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고자 생각했을 때, 내 언어는 부족하고 문장의 길이가 짧음을 인식하였다. 넘쳐나는 감정을 언어로 대신하기엔 턱없다. 처음부터 웅장한 음악 구체적인 배경, 거칠고 무질서하면서 잘 정렬된 무용가들 동작에 압도되었다. 손동작, 발동작, 몸짓으로 꾸며진 저돌적인 안무는 여립의 고민이었고 고달픈 백성들의 몸짓이었다. 정여립이란 인물을 집중하면서 그의 고민과 백성들의 삶과 그의 이야기를 몸동작으로 표현하는데 한순간도 해찰할 수 없는 무대였다. 실험무대인가 하면 이야기가 전개되고 무대에 긍정하면 새로움이었다. 역사 인물을 현대무용으로 창조해낸 “잊혀진 이름 여립” 은 지난 11월 26일 한국소리문화의 전당 모악당에서 공연된 것으로 한국소리문화의전당과 파사무용단의 기획공연이었다. 인보 정여립공이 전북사람이고 파사무용단장 황미숙 선생이 전주 사람이니 제대로 된 공연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서울과 전주를 숱하게 오가며 준비하였던 수고와 웅장하고 장엄한 무대를 펼치기 위해 이면에서 수고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접했을까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예술은 후원과 격려가 없으면 발전할 수 없다. 예술가의 고민이 먹고사는 일에서 해방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새로운 경제력이라는 신분사회에 포함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김현조 전북시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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