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세기 말 메이지 천황시대 신민화교육 뿌리내려

황태자가 됨에 상대적으로 빠지는 외모를 빼고는 동생들과의 경쟁에서 뒤지지 않습니다. 숨겨진 권력 암투 같은 것은 없이 황태자가 됩니다. 매우 진중하고, 꼼꼼하고, 사려 깊다는 느낌을 주는 행동거지를 보입니다. 그리고 놀라울 정도의 자제력을 가졌다 합니다.

사치를 좋아하지 않아 식도락은 전혀 없었으며, 공식 예복을 제외한 의류에는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이외에는 욕심이 없었다 합니다.

 1921년 3월부터 12월까지 그의 인생 최고의 순간이라고 여겨지는 유럽여행을 합니다. 모든 것에서 자유로와졌던 시간들이었다고할 것입니다. 후일의 회고에서 "인생에서 가장 즐거웠던 시간들이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귀환하고 <하라 다카시> 수상이 극우파 군인에게 암살당합니다. 당시의 일본은 황족과 보수파가 함께 하는 과두 정치체제였습니다. 그리고 1920년 정도부터 <다이쇼> 천황이 정신적 장애 상태에 빠져있어서 귀국한 이후 정무가 그에게 주어집니다. 실질적인 천황이 됩니다.

1920년대는 1차 대전으로 인한 호황이 끝나고 여러 위기가 밀어닥칩니다. 농업의 위기로 농부의 자식들이 도시로 유입되어 도시의 실업이 늘어갑니다. 따라서 노사관계에 긴장감이 돌고 계급투쟁의 싹이 틉니다. 퇴폐주의와 좌파의 확산으로 공산주의 물결이 밀려옵니다. 당시 그는 좋은 쪽으로 영향을 받아 일본역사에서 처음으로 일부일처제를 실현하는 왕이 되고자 어머니를 시중드는 여인들을 뺀 모든 <다이쇼> 천황의 후궁들을 방출합니다. 그리고 그 역시 젊음의 치기어린 해프닝도 한둘 벌이기도 합니다.

1923년의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들이 희생되었음도 이 책의 저자는 정확히 언급합니다. 이후 1924년 기다렸던 결혼을 한 <히로히토>는 1927년까지 태평성대를 보냅니다. 국민들에게는 언론도 자유스러워지고, 25세 이상 남성들에게 참정권이 주어졌으며, 정당의 정권교체도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두 정당들에게 미쓰이와 미쓰비시 재벌이 후원하여 부패가 폭넓게 뿌리를 내립니다. 겉으로는 의회 민주주의가 성숙되어진다고 당시의 일본 국민들에게 여겨졌다 합니다.

1927년의 심각한 불황의 원인이 된 은행의 도산으로 농민층과 신흥 중산층이 몰락하고 자유주의 사상이 큰 타격을 입습니다. 큰 피해를 보지 않았던 재벌들이 모든 것을 닥치는 대로 사들이고 이로 야기된 혼란이 민족주의, 군국주의 그리고 국수주의적인 비밀결사단체의 보스들에게 절호의 기회가 됩니다. 곧이어 치안유지법이 제정되고 민간의 자율권과 언론의 비판 공간이 급격하게 제재를 받습니다. 1928년까지 자유주의적 색채를 가진 모든 교수들이 대학에서 축출됩니다. 다이쇼 일왕이 1926년말 사망하고 공식적으로는 1928년 왕위를 계승합니다.

메이지 천황시대인 19세기 말부터 각급의 학교에 천황부부의 사진을 걸어놓고 신민화교육을 실시합니다. 1926년부터는 군사 훈련과 교육까지도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뿌리를 내리고, 각급 학교에서 천황 숭배 사상이 강조되며, 학생들이 <히로히토>의 초상화 앞에서 군복을 입고 행진을 벌이게 됩니다. 이는 남아도는 군 장교들을 전국의 각급 학교에 군사 교관으로 취업시켜 군부의 노령화를 방지하는 수단이 되었다는데 우리도 한때 그랬죠. <다음에 계속>

/박정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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