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주사변의 최고 배후

당시 일본의 실권을 쥔 두 사람은 육군과 해군 참모총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천황이 꼭두각시였다는 것은 결코 아니고 여러 가지 거부권 행사를 통해 최후의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육군과 해군에서 천황에게 압력을 넣을 수는 없었습니다. 중요한 결정을 발표하는 문서에 반드시 천황의 옥새가 필요하여, 사소한 문제에 대한 결정도 천황의 사전 검토가 없이는 불가능했으며, <히로히토>는 소름끼칠만큼 모든 사안을 꼼꼼하게 챙겼다 합니다. 그래서 비밀조직까지도 잘 파악했었습니다. 전통의 무게와 신성한 천황을 둘러싼 무과오성의 분위기가 대단해서 천황의 사고에 영향을 주기 위한 어떤 이야기도 불경죄로 간주됩니다. 어떤 사소한 정책도 천황이 있는 자리에서 결정되는 관행을 따라야 되었다 합니다. 일본의 천황을 중심으로한 독특한 종교체제인 神道는 천황의 무오류성이 강조되어, 천황이 무소불위 권력의 정점에서 神人(Godman) 상태에 서게 됩니다. 생사여탈권을 포함한 모든 것이 천황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1928년 6월 일본군은 중국군벌 <장작림>을 폭사시킵니다. 사건에 대한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지금의 야마구치현으로 육군을 상징하는 조슈파이던 당시 수상 <다나카 기이치>를 면직시키고 육군을 더 용이하게 통제하게 됩니다. 

1929년의 대공황으로 당시 절대적 농업국가이던 일본은 농지가 포화에 달합니다. 공개적으로 일본 경제와 농촌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유일한 대안으로 만주 식민지화를 계획합니다. 

1931년부터 부패와 말다툼이나 하는 정치인들에게 지친 천황이 제국의 단결력을 복원시킬 수 있는 군사 쿠데타에 대한 분위기가 조성됩니다. 그러나 음모설의 진원지에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관련자로 등장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얘기도 오고갑니다. 1931년 3월 음모설이 있었습니다. 수 개월 후 만주의 통제권을 얻기 위한 음모가 세 명의 장교가 입안한 음모가 있었습니다. 이 음모는 거대한 규모와 기동력 있는 자원을 동원하여 파죽지세로 밀어붙여야 한다는 점 때문에 일본군 대본영의 적극적인 지원이나 암묵적인 승인이 없이는 성공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또한 대단한 근면성과 호기심을 가진 히로히토가 몰랐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또한 성급한 행동은 자제하라는 조치를 내리기도 했으니 만주사변의 최고 배후라 하겠습니다. 당시 일본의 공식적인 입장은 천황이 관동군에 의해서 철저히 기만을 당했고, 만주사변에 적절하게 대처할 충분한 사전 정보가 없었지만 일단 사태가 진전된 다음에는 악화 반지와 장교들을 자제시키는 데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었지만 사건 전후 히로히토는 놀랍게도 <혼조> 장군과 <이타가키> 장교의 진급, 그리고 괴뢰 만주국 황제 <푸이>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을 하였습니다. 몰랐을 리 없죠.

1932년 5월 <이누카이> 수상이 테러 집단 단원에게 암살됩니다. 그는 <장제스(장개석)>의 오랜 친구였기 때문에 만주사변으로 인한 중일간의 균열 상태를 치유할 좋은 기회였습니다. 만남에서 천황이 평화를 원한다고 오판합니다. 군부의 위험한 강경파들을 소탕해야 했으나 <히로히토>는 그런 개혁 조치를 취하지 않습니다. 강경파들은 음모를 꾸미도록 방치되었고, 일본의 군사적인 개입을 유도하기 위해 상해에 있던 일본인 민간인들과 선원들이 고의적으로 일으킨 1932년 3월의 상해사변으로 모두 무산됩니다.  <다음에 계속>

/박정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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