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폭력-약탈로 추악한 '남경대학살'

1932년 2월부터 비밀결사에 의한 암살이 잇따르나 처벌은 받지만 경찰이 항상 늦장 대처를 하여 군부를 난공불락으로 만들고 정당정치에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드디어 <이누카이> 수상까지 암살이 이루어지나 사건 당시 수상은 수 시간동안 생존합니다. 그러나 테러 소식을 듣자마자 생존 여부와 상관 없이 <히로히토>는 새 수상을 임명합니다. 이후 테러범들에 대한 재판이 열리는데 피고들에게 선동적인 발언권이 무제한으로 주어지고, 판사와 검찰이 법정을 행동분자들의 광장으로 활용할 수 있게 방치합니다. 결국 민주주의를 좋아하지 않은 것이죠.

1936년 2월 20일 총선에서 중도파와 좌파가 다수당이 됩니다. 일단의 장교들이 자신들이 폭동을 일으키기만 하면 다수의 장교들이 참여하여 유신을 실행한다고 믿고,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군사 정권이 개혁을 실시하여 자본주의자와 재벌이 지배하는 정치에 종말을 고하게 한다고 믿고 2월 26일 폭동을 일으킵니다. 사실 그들의 주요 원인은 사회 정의의 부재와 물밀듯이 다가오 국수주의 충격만큼이나 큰 빈부 격차에 대한 불만이었던 것으로 밝혀집니다. 히로히토는 결연한 의지로 폭동을 진압합니다. 

하지만 이 날이 일본의 운명을 가르는 날이 되는데, 실질적으로 폭동 진압이 끝나고 국내에서 계속될 수 있는 음모나 육군의 소요 사태에 시달리는 것보다는 해외에서 군사적인 모험을 할 수 있는 돌파구를 군부에 허용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합니다. 이런 비극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는 육군의 불만을 어느 정도 수용할 필요가 있다는 걸 인정해버립니다.

1937년 7월 베이징에서 '노구교사건'을 일본이 일으켜 '중일전쟁'을 일으킵니다. <히로히토>는 중국으로 부대를 인솔하고 떠나는 중견 장군들을 한사람도 빠지지 않고 접견합니다. 그리고 전쟁 직전 도쿄 주재 중국 대사를 만난다든지 하는 고도의 기만극을 펼칩니다. 모든 병력의 이동과 진급에 대한 완벽한 정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노구교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일본군 지휘관들이 계획했던 음모에 대한 정확한 사전 정보를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일본은 천황은 아직도 몰랐다고 하고 있읍니다만. 

중일전쟁을 용인한 또 하나의 이유는 새롭게 탄생한 공산국가 소련과의 중립적인 관계 유지 모색에도 불구하고 강경 반공주의자들이 공산주의의 위협이 소련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점차 공산화되어 가는 중국도 간과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2개월이면 될 것 같았던 중일전쟁이 질질 늘어지자 11월에서 12월까지 남경에서 10여만 명의 중국군 포로와 민간인 학살, 2만여명의 중국 여성들에 대한 성폭력, 약탈로 추악한 '남경대학살'이 발생합니다. 문제는 이것이 상층부에서 내린 명령에 따른 것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중국인들에게 공포감을 불어넣어 또다른 학살을 방어하는 한편, 중국 점령을 당연한 조치로 수용하게 만들려는 목적이었을 것입니다. 아이러니칼하게도 대검이나 총살로 즉결 처분된 많은 중국 군인들이, 조차지에 살던 외국인 사회 지도자들이 돌아가더라도 일본군들이 대우를 잘 해줄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항복하라고 권유했기에 돌아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외국인 지도자들은 자책감에 시달리며 일본의 실체에 대해 제대로 느끼게 됩니다. 일본은 그처럼 근시안적이고 단기적 사고만 헀었는데 미국에 대해 잘 모르고 독일과 이탈리아를 과대평가했기에 나온 일입니다.

<히로히토>는 단 한 번도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한 적이 없었습니다. <맥아더>를 만나서도 어떤 경우에도 전쟁에는 반대했으며, 전쟁광분론자들에 대해서 철저히 지연 작전으로 대항했다고 변명했습니다. 그러나 군 지휘관들이나 대신들의 지나친 자만이나 오만함을 마치 교사로서 달래고 유도하며 목표와 전술에 대한 질문을 계속 던졌습니다. 중국과의 전쟁 성격에 대해 많은 장성들의 견해가 '밑 빠진 독'과 같은 소모전이고, 언제가 불가피할 소련과의 전쟁에 대비하자고 건의하자 발뺌한 적도 있었다 합니다. 계속 중일전쟁이 지속되도록 영향력을 유지했다는 것이죠. <다음에 계속>

/박정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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