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잇따른 침공과 공습, 잔혹성 극에 달해

1941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즉 지금의 캄보디아, 라오스와 베트남을 침공하기 직전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던 <스기야마 하지메>는 "천황은 아주 기분 좋은 얼굴이었다. 그렇게 기분 좋아한 것을 본 적이 없다."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1941년 4월 궁내성 대신은 "[황궁신문]의 전쟁 관련 기사를 보기 위해서 천황께서는 아침 일찍 하시던 승마도 포기하셨다. 국가정책이나 군사전략에 관한 모든 서류는 일일이 챙겨보시고 결재도 하나하나 직접 하신다.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일하시면서 때로는 자정까지 보고서를 직접 받으시는 경우도 있다. 천황비께서도 중국사변의 전사자와 부상자들에 대한 관심이 대단하시다"라고 언급합니다.

1941년 진주만 공습에 대해 참모총장들과의 계속되었던 토론에서 가장 놀라왔던 것은 그의 침착하고 냉정한 태도였다 합니다. 도덕성에 대한 우려, 일본 국민들의 희생, 재앙, 고통에 대한 정신적인 고뇌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일본인들이 짊어져야 할 큰짐의 무게와 피할 수 없는 처참한 결과를 짐작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합니다. 분명 전광석화 같은 공격으로 조기 협상을 끌어내면 아시아에서의 일본의 지배권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상대의 체면은 일체 고려하지 않았다 합니다. 외부 세계에 대해 무지했다는 것이 전쟁을 일으킬 수는 있어도 자기 마음대로 끝낼 수가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죠.

12월 8일 진주만 공격에 대한 소식을 듣고 "이 기쁜 소식은 선조들의 은총이다."라며 하루종일 황홀감에 취해 있어 걱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합니다.

1942년 2월 싱가포르 함락을 축하받자 기분이 한층 고조된 상태에서 "예전에 했던 말을 다시 되풀이하지만 이러한 성과는 사전 준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잘 보여주는 예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전 준비가 없었더라면 이러한 승전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지요."라 했다 합니다.

이 단계에 들어서자 소박한 인간성이 자취를 감춥니다. 진주만 공격 전에 수상 겸 내무 대신이 된  <도죠 히데키>에게 "전쟁은 가능한 빨리 끝내는 것이 좋은데,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전쟁 기간이 길어지면 인명 손실이 많아지기 때문이 아니라 군의 사기가 저하되기 때문이다." 라고 말함니다. 군인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논리로 들렸지만 냉혈한의 면모를 보입니다.

필리핀 바타안에서 대령 한 명이 중국 등에서 현지에서 일반적으로 했던 방식대로 천황의 특별 지시가 없는 데도 불구하고 부상병과 간호사들의 학살과 전쟁 포로들에 대한 잔학 행위를 천황의 이름으로 행합니다. 이를 <히로히토>에게 알렸으나 화제를 바꾸어 책임 소재에 대한 조사 명령은 일체 내리지 않습니다. 휘하의 장성들을 신임한다는 암시임에도 잔혹성이 극에 달한 증거입니다.

1942년 4월 미국 폭격기 16대가 본토를 처음 폭격했으나 피해는 미미한 편이었습니다. 그중 한 대의 승무원 8명이 잡혀 약식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습니다. 수상 <도조 히데키>는 감형을 시키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습니다만 <히로히토>는 거부합니다. 그런데 이런 결정에 가장 분개한 사람은 <히틀러>였는데 독일 폭격기 조종사들의 사기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라 합니다. <다음에 계속>

/박정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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